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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상웅 제3강] 함석헌이 곧 엄자릉 김시습이 아니던가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11 09:25]에 발행한 글입니다.


“삼공벼슬 준다한들…”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한 개 선비로서 일어나 어지러워 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전쟁이 다 끝나고 천하가 완전히 제 손아귀에 들어온 줄을 알게된 담, 맘에 좀 불안을 느꼈다. 이제 천하에 나를 칭찬 아니할 놈이 없고, 내게 복종 아니할 놈이 없건만, 단 하나 한 사내만이 맘에 걸린다. 그것은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광무제의 동창 벗이었다.

한 가지 성현의 도를 닦는 시절 서로 맘을 알아주는 벗으로 허락을 했었고, 높은 이상과 도타운 덕에 있어 그가 자기보다 한 걸음을 내켜 드딘 줄을 아는 광무제는 첨의 선비의 뜻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자릉이가 자기를 속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줄을 알았다. 그 생각을 하면 앞에 네 발로 기며 아첨하는 소위 만조백관이란 것들이 보기도 싫었다.

그래 사람을 부춘산에 보내 냇가에 낚시질하는 엄자릉이를 데려오라 했다. 자릉이 따라왔다. 대신이오 무어요 하는 물건들이 뜰 아래 두 줄로 버텨 서서 감히 우러러도 못보는 데를 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 앉은 곳으로 쑥 올라갔다. “아. 문숙(文叔)이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에 몇 해의 전쟁이오 나라요, 정치요, 천자요, 그런 것은 당초에 코 끝에 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하들은 어쩔줄을 몰랐다.

광무도 도량이 넓다고는 하나 짐승처럼 부려먹는 신하들 앞에서 제 위에 또 권위가 있는 것을 허락해 보여 주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릉이를 신하 대접을 했다가는 당장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고 물론 자릉이 그럴 이도 없겠지만 광무의 맘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인지 모르는 기(氣)에 눌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신하들 보고는 “너희들은 물러가라, 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정을 좀 풀련다.”했다. 밤새 이야기를 하다 잤다. 천문을 보는 신하가 허방지방 들어와 “큰일 났습니다.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했으니 무슨 일이 일삼는지 모르겠습니다.”했다. 태백이란 지금말로 금성인데 옛 사람 생각에 그것은 임금을 표시한다 했다. 객성이란 다른 별이란 말이다. 임금을 절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엄자릉이 자면서 광무의 배 위에다 다리를 펴 올려놓고 잤더라는 것이다. 그래 후의 시인이 자릉의 그 기상을 대신 말하여,

萬事無心一釣竿 (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 (삼공불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 (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萬世間 (야기허명만세간)

일만 일에 생각 없고/다만 하나 낚시대라
삼공벼슬 준다한들/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날려/온세상에 퍼졌구나.

함석헌이 이 무렵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엄자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이 가장 따르고자 했던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이 아닐까. 세조 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소식을 듣고 중이 되어 독서와 저작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유교와 불교의 정신에 통달하고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당대에 으뜸이었으며 산천을 주유하고, 권력자들을 타매했던 ‘무관의 제왕’이었다. 매월당은 함석헌 그 자신이다.

김삼웅 선생님은
■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계시다가 그후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민주화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과 독립기년관 관장을 지낸바 있으시다. 지금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 선생님은 최근에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을 쓰셨고, 날카로운 필치로 주로 인물평전을 많이 쓰셨다. "안중근평전", "백범김구평전", 녹두전봉준평전", 만해한용운평전", 단재신채호평전" 등이 있으며 지금은 오마이뉴스에 "장준하평전'을 연재하고 계신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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