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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함석헌의 진리 인식과 초월자에로의 기투

by anarchopists 2019. 11. 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4/08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진리 인식과 초월자에로의 기투


“진리란, 지축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물결은 늘 뛰놀면서 바다는 언제나 평이한 것처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8쪽).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 함석헌은 그것을 진리라고 역설한다. 상대적 세계에서는 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변하지 않음을 끝까지 견지하고 있는 것이 진리다. 이는 만물은 생성변화 하지만 그 속에 영원불변의 로고스가 있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E 535~475)나 진도약퇴(『도덕경』, 41장, “進道若退”)를 말한 노자(老子)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진리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진리의 외형만을 보고 진리의 퇴색을 외친다. 어쩌면 진리의 왜곡이란, 하늘과 맞닿은 세계를 열어주는 종교경전을 제대로 보지 않고 가벼이 말하는 것이리라.



진리는 초월의 세계, 삶의 초월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상(Schein, 假象)의 진리가 아니라 참의 진리, 빛의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변화를 주도하는 진리가 변화 속에 있으니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불변의 씨앗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게 급선무다. 볼 수 없거나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는 이상 변화, 퇴보, 퇴색만 보이니 진리 그 자체가 원본적으로 다가올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본시 “성경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불살라 열과 빛을 내잔 하늘 닿는 굴뚝이다. 올라갈수록 그 흔들리는 도는 놀랍게 늘어간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8쪽). 그래야만 진리의 상승 기류를 만나 하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단지 문자가 아니라 올라-감이다. 오르고 올라서 도(道)에 다가가도록 만들어 주는 진리다. 노자가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말했듯이, 도를 향해 올라가면 결국 저절로-그러함의-존재와 만나게 된다. 신 혹은 초월적 존재는 스스로-있음, 저절로-있음, 저절로-그러함이다. 이제 성서의 문자를 떠나서, 문자를 넘어선 저절로-있음 그 자체로의 비약이 필요하다. 성서가 문자가 아니라 비약하는 정신이 되려면 씨알이 되어 자라고 또 자라야 한다. 문자가 죽고 문자의 의미가 싹틔운 뜻만이 살아서 사람을 자라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성경은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이기 때문에 그 첨 형상이 없어지도록 키어내야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9쪽)고 말한다. 의미가 꿈틀거리는 씨알, 삶이 서부렁섭적 피어나는 씨알, 사랑이 모락거리는 씨알로 살아야 성서적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성서의 의미 덩어리들이 모여 움트려는 진리 가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아가 발언되고 살게 되면 단순한 말덩어리들 혹은 말조각들은 진리가 된다.


“성경은 변치 않는 영원 절대의 것이 변하는 일시적 상대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영원 절대인 데 대하여는
들을 줄 알고 들어야 한다. 글은 굳어졌는데 뜻은 자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에 끊임없는 새 해석, 고쳐 씹음이 필요한 까닭이다. 덮어놓고 믿는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 덮어놓고 읽기만 하지 않는 읽음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것을 덮어놓고 믿는 믿음은, 열어젖힌 마음의 칼로 성경을 사정없이 두려움 없이 쪼개고 열어젖혀서만 얻을 수 있다. 성경은 덮어놓고 읽을 글이 아니요 열어놓고 읽어야 할 글이다... 덮어 둘 것, 은밀하게 둘 것, 신비대로 둘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 그 밖의 것은 다 열어젖혀야 한다. 성경은 연구해야 하는 책이다. 연구하지 않고 믿으면 미신이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은 될 수 없고, 그 밖의 것은 다 연구해서 밝혀야 할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8쪽)


아무리 성서가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이라 해도 문자로 되어 있는 한 읽혀야 한다. 열어 젖혀서 밝혀야 한다. 글자를 읽어야 들을 수 있다. 글자가 살아나려면 읽어야 하고 읽게 되면 의미가 새겨져 뜻이 올라와 초월자의 말씀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어원이 되기도 하는 relegere는 legere(읽는다)에 re(다시)가 붙지 않으면 종교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종교가 살아 있는 실체로서 존재하려면 종교 경전이 화석화되지 않도록 다시 읽고, 고쳐 읽어야 한다. 문자와 문자, 글자와 글자, 문장과 문장이 풀어 밝혀져 ‘그때 거기’의 의미가 ‘지금 여기’의 의미로 열려서 나타나야 한다[開顯]. 문자가 읽힘으로써 밝혀내는 것 사이로 나타나는 것은 의미 그 자체, 즉 초월자(하느님)이다. 그러므로 굳어진 채 글자로 남아 있는 것 틈새로 나타나는 것은 초월자 그 자체이다. 초월자는 들이 파서 길어 올려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파고 열어서 문자의 뜻을 밝히지 않으면 초월자를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초월자는 문자를 통해서, 문자의 열려짐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것이 읽히고 발언되는 순간 초월자의 목소리가 된다.


오늘날 종교(religion)가 종교 노릇을 잘못하는 이유는 문자에 얽매어 초월자의 목소리를 열어 밝히지 못하거나 문자의 뜻을 길어 올리는, 문자의 의미를 들이 파는 힘이 모라자서 뜻 없는 인간의 소리만이 들리기 때문이다. 정작 놔둬야 하는 초월자를 들먹이며 공허한 낱말과 개념만을 나열하는 종교의 목소리는 장단 없는 꽹과리요 힘없이 불어 대는 퉁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난무하는 종교의 목소리는 애꿎은 씨알들을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하고 신비(myein, 눈을 감는다)를 다 알아버린 듯 그 가상(假象)을 입에 달고 다닌다. 물론 초월자는 문자를 통하여 이미 와 있다.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현재화하고 도래하게 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온전히 열어 밝히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것을 살아내겠다는 의지에 앞서 요구되는 것은 문자를 시간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텍스트의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뜻을 드러내는 초월자의 현재와 도래에 사심없는 기투(企投, Entwurf; Projection)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초월자의 존재 가능화는 문자의 시간화와 무지(無知)로부터의 개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은총의 빛(Thomas Aquinas, 1225?-1274)으로 인한 인식의 확장, 그리고 신의 망각(Vergessenheit)으로부터 새롭게 회상(Erinnerung)하는 것이며, 인간의 탈자적 피투성(내던져져 있음, Geworfenheit)을 통하여 초월자에의 헌신으로 이어진다. 인간 자신(의 유한성)은 절대적 존재에게 내던져짐으로써 완전한 위험에 처해지지만 그것이 인간의 종교적 실존의 본래적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문자적 유한성과 무지를 극복하게 된다면 생성 변화하는 상대적 세계에서 갑작스런 하늘 세계, 탈은폐적(aletheia)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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