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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복지논쟁, 복지는 곧 민족의 생존문제이다.

by anarchopists 2019. 12.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2/0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복지 - 생존의 문제


최근 때 아닌 복지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진즉 통과했어야할 논쟁이 뒤늦게 시작한 셈이다. 복지가 제도화가 안 된 사회는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없다. 그동안 파이를 키우고 봐야지 분배를 말할 때가 아니라는 논리로 집권당은 복지문제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그래서 이제 파이가 커졌단 말인가. 커진 파이를 잘 나누어먹고 있는가. 둘 다 아니다. 분배가 안 되면 소비도 안 되고 생산이 늘 수 없다. 가진 자는 더 갖게 되었고, 게다가 세금까지 감면해주니, 사치품만 업그레이드할 뿐이다. 그 결과 (특히 청년) 실업은 늘어만 간다. 복지도 제대로 안 된 사회가 물가는 치솟고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비싼 집, 일류 학교, 백화점, 호텔, 유흥장, 고급 식당, 리조트, 비행기여행 등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간다. 국회의원도 돈 없이 당선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공평한 분배는 곧 복지다. 분배가 점점 불공평해지고 있다는 것은 양극화가 더 심화된다는 통계에서 들어난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공정사회’를 들고 나온 것도 불공정한 사회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정의를 다룬 책이 잘 팔리고 있는 것도 정의를 목말라하는 정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불공정은 불공평을 낳는다. 불공평한 사회가 불안전한 사회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복지는 곧 사회안전망이다. 빈부격차는 사회 불안과 갈등의 요인이 된다. 무장한 사병(私兵)을 배치해야하는 필리핀 부유층을 보라. 한 때는 한국보다 훨씬 더 잘 사는 사회였다. 사회복지를 소홀히 한 결과 그렇게 전락한 것이다.

복지는 개인적 차원보다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개인 복지나 가정 복지를 넘어선 사회복지라야 한다. 뒷 것이 되면 앞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대학에는 ‘사회복지학과’가 있다. ‘보편 복지’니 ‘선택적 복지’니 ‘맞춤 복지’니 수식어를 따로 붙일 필요가 없이 사회복지면 그만이다. 사회는 공동체 전체를 가리킨다. 공동체처럼 사회의 영역은 부족사회, 민족사회, 인류사회 등으로 확대될 수 있다.

공산주의체제를 사회주의의 유일한 제도로 보는 반공주의 때문에 우리는 사회주의를 마치 금기어처럼 취급해왔다. 민주체제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당이 공존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민주노동당 이전에 ‘사회민주당’이 등장했어야 했다. ‘노동’보다 ‘사회’가 덜 계급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노동계층과 비-노동계층을 구분하는 반면에 ‘사회’는 무계층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함석헌은 사회 대신 '전체‘를 선호했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 복지도 따로 수식어가 필요 없는 말이다. 어떻게 표현 하든 결과적으로는 보편적인 복지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적’ 복지도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자칫 정치적 음모에 휘말릴 수 있다. 언어 게임을 그만하고 실천방법론만을 이야기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증세 문제가 초점이 되고 있다. 우선 상식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중하층은 부담을 줄이고 상류층이 부담하게 하면 된다. 누진세율을 법대로 적용하면 된다. 이것은 선진국들이 채택하고 있는 과세방식이다. 빈자 감세면 몰라도 부자 감세는 몰상식한 짓이다. 그것은 지금 미국이 지금 앓고 있는 병이다. 부시가 시행한 정책을 폐기하지 못하는 사정 때문이다. 우리까지 흉내 낼 필요가 있는가.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양심이 마비된 상류층은 포기해도 된다.

한국이 흉내내야할 대상은 서구, 특히 행복지수 등 모든 통계에서 앞서가는 북 유럽국가들이다. 이 나라를 일찍 배우지 못한 것은 지역학 연구가 미진한 한국 학계의 책임이 크다. 최근에야 몇몇 정치인, 언론인이 이 ‘강소(强小)국을 배우자고 나섰다. 복지 논쟁도 한 정치인이 그곳을 방문하고 소신을 펴면서 발단된 것이다. 이들 네 나라의 공통인수는 사회민주주의이다,.

일본에서 자민당이 반세기 이상을 지배했듯이, 이 국가들은 사회민주당이 오래 지배해오는 과정에서 복지국가가 되었다. 약간 보수적인 정당이 어쩌다 집권하기도 하지만 (현재 스웨덴 처럼) 대부분 사민당이 압도적이다. 설사 다른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이미 구축한 사회복지 정책의 틀을 바꾸지는 않는다. 보완하고 약간 다른 정책을 실험할 뿐이다. 우리 여당처럼 과거의 잘된 정책을 온통 바꾸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 대통령이 덴마크 국왕을 만났을 때 그 나라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소견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 맥락을 알 수 없다. 물론 국왕은 실권 없는 상징적 지위일 뿐이고 국민과는 다른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서 한 말일 것이다.)

필자는 우연히 연구와 학술회의 일로 네 나라를 단기간, 장기간 자주 방문,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체험한 나라 중 가장 아름다운 사회였다. 인상에 남는 일 하나는 의사를 만나는 것처럼 이발사와도 시간 약속을 하고 며칠 후에야 간 일이다. 아마 의사와의 임금격차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다소 있더라도 과세로 좁혀진다. 스웨덴의 한 교수는 세금을 60% 정도 납부한다고 했다. 은퇴할 때에야 필요해서 차를 샀다. 내가 만난 학자들은 거의 차를 소유하지 않았다. 덴마크의 한 학자는 차를 꼭 필요로 하지 않고 환경공해 때문에도 차를 사지 않았다고 말했다. 차를 살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차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들 물려주려고 안간힘을 다 하는 한국 사회와 대조된다.

이 국가들의 아름다움이 잘 들어난 일이 또 있다. 이 나라들에 우리가 버린 지식들이 많이 가있다. 인구 5백만의 스웨덴에도 당시 8천명가까이 입양아가 있었다. 덴마크 대학(코펜하겐)에는 입양아 학생회가 있어서 생부모재회와 조국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들었다. 이들이 복지국가에 가서 잘 자라준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우리는 북구 나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6.25때는 네 나라가 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더니 고아들까지 (네 나라 합쳐서) 수 만 명을 데려갔다. 이것도 다 복지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구비례로 봐서 아주 많은 수효이다. 우리는 스스로 몇 명이나 입양 시켰는가를 따져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북구, 나아가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서 우선 배워야 할 것은 교육이다. 교육 방식과 무상교육 두 가지에서 그 이상 더 좋은 모델은 없을 것이다. 성적을 매기지 않고 경쟁보다는 협동을 배우고 자기 재능과 취향만을 기준으로 진학하든지 사회에 진출하던지 선택하는 교육의 장점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각급 학교의 교육비는 대학까지 모두 국가가 전적으로 부담한다. 결국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은 국가가 시켜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원리다.

한국사회처럼 의무교육이 아니라고 해서 고등학교에서도 상당한 학비부담을 주는 사회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대학생들의 등록금 투쟁이 상징하는 개인 부담을 지는 교육은 아주 후진적인 것이다. 대학입학은 선택과 자격에 의해서 평등하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해마다 인상되는 등록금은 국민소득을 기준해서 상대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이다. 비교적 학비가 비싼 미국대학을 능가한다. 그것도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립대학이 대부분이다. 학교는 영리단체일 수는 없다.

학교제도를 개혁하지 않고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교육이 선행하지 않고서는 사회발전, 국가발전은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다. 예산이 크게 드는 것도 아니다. 가령 100개의 종합대학에 (년 예산 1000억-2000억) 비용을 다 감당한다 해도 10조-20조면 충분하다. 밖에서 받는 연구비를 제외하면 비용은 그 절반정도가 될 것이다. 사유화로 인하여 국가에 끼치는 간접비용을 감안하면 공교육화로 국가가 지출하는 비용은 더 줄어진다.

교육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것은 저출산 문제의 열쇠라는 것이다. 세계 최하위 수준의 저출산의 근본원인은 양육비이고(평균 2억 6천만원이라는 조사가 있었다.) 그 대부분은 사교육비를 포함한 교육비이다. 해결책은 너무나 간단하다. 양극화와 교육제도가 국력약화의 원인을 제공한다. 교육혁명이 사회개혁의 열쇠가 된다. 족벌들의 반발이 거세겠지만 공립화로 가는 혁명차원의 개혁이 있지 않는 한 국가발전은 곧 한계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이런 교육제도 하에서는 창조적인 인재가 나올 수 없다. (연두교서에서도 한국교육을 높이 평가한 오바마는 뭔가 오해하고 있다. 저학년 통계만 보았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으로는 올라갈수록 창조성이 떨어진다. 그나마 좋다는 것은 골프와 음악에서 표출된 한국인의 생래적 우수성 때문이지 교육제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창조적 인재는 한국교육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이렇듯 다른 분야보다 교육문제 하나만 풀어도, 즉 교육제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놓는다면 한국사회의 복지는 크게 향상될 수 있다.

우리에게 복지는 더 잘 사느냐는 문제만은 아니다. 복지 논쟁은 자칫 학자와 정치인들의 공리공론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현실사회에서 복지는 곧 생존의 문제이다. 미시적 차원에서, 이 사회의 수많은 하층민, 소외된 계층, 비정규직, 결손가정 자녀들, 학벌이 없는 사람들, 청년실업자들, 무의탁 노인들게 복지는 생존의 문제이다.

거시적 차원에서, 복지국가로의 이행은 국가로서 생존할 수 있는가가 달려있는 문제이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생존하더라도 정신적으로 무가치한 사회, 그리고 돈의 노예, 언론의 노예, 천박한 문화의 노예가 되는 노예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세계-중심 사회가 되기 전의 민족-중심 사회에도 진입하지 못하고 아직 자기-중심 사회에 머물러 있다. 민족-중심 사회라면 동서가 갈등하고 남북이 분단된 채 있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개인주의자도 채 못 된 이기주의자, 기껏 해야 집단 이기주의자들의 집합이다.

명실상부한 복지국가가 못 된다면 우리 사회는 존재이유와 결집력, 연대성을 상실한 사회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복지는 단순히 정책의 문제가 아니고 민족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2011. 02.06,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네이버의 아고라 등지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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