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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부 논단

'국민'이란 단어, 그리고 함석헌의 국민인식

by anarchopists 2019. 12.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01 09:56]에 발행한 글입니다.


'국민이란 단어,
그리고 함석헌의 국민인식

함석헌이 자주 민중과 함께 섞어 쓰고 있는 國民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어떤 개념인가. 일찍이 함석헌은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세계는 하나의 세계일 것을 생각하고 그 세계의 주인은 민일 것을 생각하고, 이 교육에서 시급히 고쳐야 할 것을 찾아본다면 무엇인가? 학교 이름부터 국민학교란 것을 떼어버리고 유산, 무산을 가릴 것
없이 적령이 된 아이는 다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국민학교란 이름은 지난날 일본이 전제주의의 독재정치를 민중 위에 씌우려 할 때에 붙인 것이다. 거기는 국가지상주의, 민족숭배사상이 들어 있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는 세계의 시민일 터인데 그런 것을 붙여 인간성을 고의로 치우치게 하면 그것은 나아가는 역사 진행에 공연한 마찰만 일으키는 일이다.”
(1959년 글; 〈새나라 꿈틀거림〉, 저작집 3권, 244쪽.)

함석헌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국민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전체주의 독재정치를 민중 위에 씌우려고 붙인 이름이다. 그러면 국민이라는 용어가 생겨나는 역사적 과정을 보자. 국민이라는 단어는 고대 중국에서도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의 개념이었다. 《史記》, 〈東越列傳〉에 보면,“(민월왕 영郢의 동생인) 여선이 자기 형인 영을 죽이고 나라 안에 위엄을 행사하니 국민들이 다 이에 속하게 되었다. 여선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餘善已殺郢, 威行於國, 國民多屬, 竊自立爲王, 《史記會注考證》 권114, 新世界出版社, 4668쪽)라 하여 국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외 《周禮》와 《左傳》에도 국민의 단어가 문화적 주체가 아닌, 피지배층 백성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양에서 국민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natio에서 왔다. ‘일정한 영토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 국민의 개념이 처음 쓰인 것은 신성로마제국과 비잔틴의 영토분쟁에서이다. 그러다가 유럽의 중세인 봉건시대 말기에 “자연경제의 붕괴·상업의 발달·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더불어 근대국가와 민족주의가 출현한다. 근대국가와 민족주의에서 근대적 의미의 국민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공통의 사회·경제·정치생활을 영위하고 공통언어·문화·전통을 지닌” 민족공동체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인간공동체, 곧 국민국가(Nation State; national state)가 출현하게 된다. 국민국가의 출현은 유럽의 중세말기 르네상스 종교개혁 신항로의 재발견 등을 통한 중앙집권국가가 성립하면서 도래한다. 그러나 이때의 중앙집권국가는 봉건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절대왕정 하의 국민국가였다.

그래서 시민으로 대변되는 국민은 부르주아(자유시민; 상인계급)에 한정되었다. 그리하여 국민은 정치적 권리를 갖는, 그리고 문화적 주체로서 국민이 될 수 없었다. 문화적 주체로서 국민의 개념이 성립하는 것은 18세기 프랑스의 시민혁명(1789) 이후다. 이때부터 국민국가에서는 국민을 인종이나 종족이 아닌 민족(nation)으로 보며, 전체민중인 시민(citizen)으로 보게 되었다. 이 국민국가는 경제공동체이기도 하지만 민족어, 민족문화, 민족감정, 민족의식, 민족 정체성 등을 토대로 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절대왕정시대 국민국가 때의 국민은 문화적 주체가 될 수 없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국민은 문화적 주체로서 국민이었다. 이렇게 국민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19세기에 들어오면 근대의 국민은 이제 객체적 존재(통치나 수탈의 대상이 되는)에서 벗어나, 정치경제와 문화예술에서 주체적 존재로 나서게 된다. 이러한 사조가 팽배되면서 국민국가는 점차 다른 민족과 국민에 대하여 배타성을 띠고,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로 나가게 된다. 지나친 자민족중심주의는 결국 제국주의국가를 탄생시키고 남의 영토와 민족, 그리고 국가를 침략하게 된다. 이 결과 식민지국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 노정에 있는 이의 영향으로 아시아국가에서도 20세기에 들어와 자민족(自民族) 곧, 인민을 국민이라고 호칭하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의 孫文에 의해 창당되는 中國國民黨(1912), 그리고 한반도의 조선말기 애국계몽단체의 하나였던 國民敎育會(1904), 미국에서 결성된 國民會(1909) 등에서 사용되는 국민이라는 용어다. 이로부터 동아시아에서 국민이라는 호칭은 보편적 용어가 된다. 즉, 식민지조선시대의 재미교민단체에서 발간한 國民報(1913) 임시정부시대 國民代表大會期成會(1921), 그리고 카프문학에 대응한 문인들의 활동을 총칭하는 최남선 중심의 國民文學(1920년대) 등에서 국민이라는 명칭들이 폭넓게 사용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국민이라는 용어는 제국주의 용어다.

특히 식민지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1930년대 만주사변(1931. 9.18) 이후 대륙침략을 위한 한국병참기지화 정책을 들고 나온다. 일제는 이를 지원할 노예화된 문명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보통학교 명칭을 소학교로 바꾼다.(3차 조선교육령, 1938.3) 이어 일제는 태평양전쟁(1941. 12.7)을 일으킨다. 그리고 식민지한국에 황국신민화정책을 쓴다. 이의 필요에 의해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한다.(제4차 조선교육령, 1943. 4.1) 다시 말하면, 일제가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한 것은, 그 목적이 한국인을 황국신민(皇國臣民; 皇國의 道에 따른 국민연성)으로 만들자는 데에 있었다. 곧, 식민지한국인을 일제천황의 백성이 되게 하자는 의미였다. 진짜 한일합방이다. 그
래서 황국(皇國)의 국(國)과 신민(臣民)의 민(民)을 따서 ‘황국신민을 만드는 학교’라는 뜻에서 국민학교라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사악하고 간교한 정책에 따라, 각종 학교의 교과서에 국민(황국신민)이 되는 언어라는 뜻에서 일본어를 ‘국어’(國語)로, 황국신민의 역사를 배운다는 뜻에서 일본역사가 국사(國史)가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한국인도 일제의 ‘국민’(國民)이 되었다.


그런데 이 나라 헌법에서 인민 대신 국민으로 쓴 것은 제국주의시대 배타적 국민의 개념이고 전체주의 시대 사용되었던 국가에 충성하는, 특히 황국신민의 개념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각급학교 교과서에서 쓰고 있는 국민의 개념은 일제강점기 식민지한국인을 의미하는 ‘국민’의 의미다. 즉, 이 나라 교과서와 헌법에서 쓰고 있는 국민이라는 용어에서는 제국주의ㆍ침략주의ㆍ독재주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승만이 처음 헌법에서 인민대신 국민을 채택한 것은 아마도 이 나라 사람들을 이승만 자신에게 충성하는 국민을 만들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이후 친일권력에서 친미권력으로 넘어가면서 여전히 인민 대신 국민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친일적 친미관료들로 가득 찬 정치권력들이 이 나라사람들을 일본 대신 미국에 충성하고 독재권력에게 충성하는 한국인을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전히 ‘식민지근대화론’에 근거하여 미국의 원조와 군사독재의 영도력으로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는 설명을 하기 위하여 역사교과서도 여전히 <국사>라 하고, 한글을 諺文化하고 英語沒入을 위하여 우리의 한글을 가르치는 교과서도 여전히 <국어>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1960년대 이후, 계속해서 함석헌이 그의 글에서 민중을 백성으로, 백성을 국민으로, 국민을 민중으로 섞어 쓰고 있는 것은 당대의 시대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용어선택에서 함석헌이 민중이 봉건시대 탄압을 받았던 백성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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