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14 03: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생각과 걸림)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모든 일은 뜻이다. 뜻에 나타난 것이 일이요 물건이다. 사람의 삶은 일을 치름[經驗]이다. 치르고 나면 뜻을 안다. 뜻이 된다. 뜻에 참여한다. 뜻 있으면 있다[存在]. 뜻 없으면 없다[無]. 뜻이 있음이요, 있음은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전집》 14, 한길사, 1985, 109-110쪽)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한편의 글이 발표됩니다. 이승만 정권의 폭정이 극에 달할 즈음에 함석헌이 발표한 바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국민이 똑똑히 보고 분명히 생각하면 그 나라엔 희망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함석헌이 말하는 ‘생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단
순한 의식작용이나 인식수단을 넘어서는 참된 진리 인식에 이르는 고차원의 의미영역을 가지는 개념이다. 편협하고 사사로운 공허한 생각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공적이며 공공의 윤리를 이끄는 사고 체계를 가리킨다. 그분의 생각은 언제나 이기적 유익을 초월한 이타적 유익을 유발하는 행위 인자의 역할이다.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으로 불리는 화엄경이 있다. 이 화엄경에서는 네 종류의 ‘법계(法界)’를 이야기한다. 법계는 보통 ‘깨달음의 차원’으로 해석된다. 첫째는 이무애(理無礙)의 법계이다. 하늘의 이치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둘째는 사무애(事無礙)이다. 땅의 일처리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셋째는 이사무애(理事無礙)이다. 하늘의 이치뿐만 아니라 땅의 일처리에도 아울러 통달한 경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사무애(事事無礙)이다. 일과 일에 걸림이 없는 단계를 가리킨다. 최고의 경지가 사사무애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사무애’란 과연 어떤 경지인가?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일에 모두 걸림이 없는 이사무애의 경지에 이르기도 거의 불가능한데도 사사무애를 또다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과 일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성경에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에게 물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으니 당연히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여자를 살려주자니 율법에 위반이 되고, 그렇다고 돌로 치자니 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가 되는 상황이다. 어느 쪽이든지 한쪽은 걸리게 되어 있었다. 이때 예수가 내린 판단이 그 유명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이 바로 사사무애의 전형이 아닐까. 일과 일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현실의 모순되는 상황에서 양쪽에 걸림이 없이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로 사사무애(事事無礙)인 것이다.
모순의 시대로 요동친 근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그분은 적어도 거의 거침이나 걸림이 없었다. 전혀 세속적인 명리
를 추구하는 마음이나 욕망 그리고 집착까지 모두 버렸던 그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그분의 생각은 지행일치(知行一致), 신행일치(信行一致), 사행일치(思行一致)로서 생각과 실천이 따로 떨어진 관계가 아니다. 생각이 곧 실천이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반대로 보면 생각하지 않는 백성이 사는 세계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백성으로서의 뜻을 품고, 뜻을 깨닫는 일은 생각하는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생각하는 수고 없이 어느 누가 진정으로 사사무애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박정환 목사님은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영남신학대학교와 장신대 신학대학원(목회연구과)을 거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생태영성을 연구하여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강사이면서 포항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포항바다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바다’라 함은 “바름과 다름”의 합성어다. 박목사님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정보는 cafe.daum.net/seachurch에서 얻을 수 있다.
또한 박목사님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모든 일은 뜻이다. 뜻에 나타난 것이 일이요 물건이다. 사람의 삶은 일을 치름[經驗]이다. 치르고 나면 뜻을 안다. 뜻이 된다. 뜻에 참여한다. 뜻 있으면 있다[存在]. 뜻 없으면 없다[無]. 뜻이 있음이요, 있음은 뜻이다. 하나님은 뜻이다. 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전집》 14, 한길사, 1985, 109-110쪽)
그러면 함석헌이 말하는 ‘생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단
그러면 ‘사사무애’란 과연 어떤 경지인가?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일에 모두 걸림이 없는 이사무애의 경지에 이르기도 거의 불가능한데도 사사무애를 또다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과 일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모순의 시대로 요동친 근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그분은 적어도 거의 거침이나 걸림이 없었다. 전혀 세속적인 명리
**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박정환 목사님은
또한 박목사님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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