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5/24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절대다수의 백인들에게 흑인은 원시적인 형태의 성 본능을 대변한다. 흑인은 모든 도덕과 금기 너머에 있는 잠재적 생식력의 화신인 것이다. 백인 여성들은 순수한 귀납과정을 통해서 흑인들을 축제와 바카스 주신, 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의 성감각 그곳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존재 혹은 그곳의 보이지 않는 문을 지키는 수호신 정도로 생각한다.”(F. Fanon,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212쪽)
인간에게 있어서 성(性, sex)이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로인해 성의 즐거움, 쾌락, 생산 등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러한 인체생리학적 구조의 생명체계가 있기 때문에 성은 본능적 욕구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을 단순히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항대립의 구조로만 놓고 본다면, 구별과 구분, 혹은 차별과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 차원의 논의에서 성(性, gender)은 의미가 부여된 성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그런 연유로 한나 아렌트(H. Arendt)가 생물학적 생명인 조에(zoe)와 의미가 부여된 비오스(bios)를 구분했던 것처럼, 여성 혹은 남성들의 역할이든 나아가 동성애자들의 행위이든 인간의 성이란 “기술과 이윤이 지배하는... 동물학적 생명체로 축소”시킬 수 없다. 성은 ‘의미’를 지닌 생명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Catherine Clément/ Julia Klisteva, 임미경 옮김, 여성과 성스러움, 문학동네, 2002, 26-27쪽) 그 의미란 경험 이전의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한 주체가 아니다. 의미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내 이전에 이미 그곳에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며 말이다.”(F. Fanon, 앞의 책, 169쪽)
여기에서 성은 성스러움과 연결이 된다. 그것은 초연함(indifférence, 무관심), 즉 모든 차이를 없애는 다르지-않음
(in-différence)이라는 평형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란 없다.(Catherine Clément/ Julia Klisteva, 앞의 책, 129쪽) 남성성과 여성성, 그것은 초연함을 통해서 서로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서로의 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상호주체성을 갖게 된다. “성스러움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끌어들인다. 성스러움은 ‘또 다른 질서’에 속하는 것”, 더 나아가 초월(transcendence)을 통하여 모든 대립들을 넘어서는 것(Catherine Clément/ Julia Klisteva, 위의 책, 218-219쪽)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을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항대립의 구조 속에서 봄으로써 성스러움에 근접하는 경계와 금기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 다시 말해서 정결과 오염이라는 양면성 속에서 고민해왔다. 성은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타락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이다. “실수투성․죄의식․죄의식의 거부․편집증 등. 동성애 영역의 뒤편에는 이런 것들이 숨어 있다.”(F. Fanon, 앞의 책, 217쪽) 이렇듯 유독 동성애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교회가 관대하지 못한 것은, 동성애는 신이 창조한 세계 내에서의 근본적인 질서를 와해시키는 성의 일탈을 가져오는 것이며 차이를 부정하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차이의 소멸은 분명히 질서를 교란시키거나 폭력을 낳을 수도 있지만, 그와는 달리 차이를 강조하는 사회나 종교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차별을 합리화하거나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최창모, 금기의 수수께끼, 한길사, 2003, 220-221쪽)
동성애에 대한 교회적 시선이 타협의 여지가 없이 매우 비판적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회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동성애와 같은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동성성교(homogenitality)나 동성성교행위(homogenital acts)라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인식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더불어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종교적 관심사는 성결(정결)이었지 섹스 자체(혹은 동성 간 성행위)의 옳고 그름의 윤리․도덕적 문제가 아니었다(레위 18,22; 로마 1장․14장 참조). 그저 비일상적인(unnatural, para physin[본성을 넘어서는/거슬러; 비정상적인]↔kata physin, 일상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오히려 사도 바울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음식물에 관한 관례, 할례 관습, 성행동의 차이 등 어떠한 성결 요건이나 문화적 차이도 그 자체로는 윤리적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게이나 레즈비언 섹스 자체가 선한지 악한지, 즉 동성 간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분명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성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결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며, 오히려 동성애에 대해서는 일부러 개의치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Daniel A. Helminiak, 김강일 옮김,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도서출판 해울, 2003, 32, 61, 90, 98-100, 142, 202쪽 참조)
이에 “동성애자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완전하게 창조하셨다.”는 한계에 대한 진심어린 수용이다.”(이상억, “동성애자를 위한 돌봄의 목회미학”, 기윤실부설기독교윤리연구소 편,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1, 277쪽) 논의를 좀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 프란츠 파농(F. Fanon)의 흥미로운 표현을 한 번 들어보자. “논란에 논란을 거듭한 끝에 과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흑인도 인간임을 인정했다. 생체내적으로나 생체외적으로 마침내 흑인도 백인에 버금가는 인간이 된 것이다.”(F. Fanon, 앞의 책, 152쪽) 동성애에 대한 반대 논쟁은 결국 성차별의 논쟁이자 인간우생학적(혹은 인종차별적)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몸 안과 밖의 차이의 인정, 앞에서 말한 초연함의 태도는 인간성(性)의 긍정을 통한 인간성(humaness/sacred)의 인정으로 나아가면서 상호주체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여전히 다항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파농이 주장하고 있는 논리를 빌려 말한다면, “생물학적 공포” 때문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논지의 핵심은 흑인 공포증이지만,(F. Fanon, 위의 책, 200쪽) 이를 확대하자면 교회는 성공포증(sexophobia, 성혐오증)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성공포증은 위험을 암시한다. 생물학적 공포증, 즉 백인우월주의에 반하는 공포증, 가부장적 남성주의에 반하는 공포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포는 곧 금기와도 연관이 된다. 그래서 직업, 권력, 경제력, 정치행위 등을 포함하는 공론장(Öffentlichkeit) 혹은 생활세계에 대한 공포와 위기, 긴장과 위험을 인식하면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공포증으로부터의 탈출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의 해방’이다.( F. Fanon, 위의 책, 230쪽) 남성성을 대변하는 주인과 여성성을 대변하는 노예, 이성성을 대변하는 주인과 동성애적 성 일반을 대변하는 노예의 의식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이다. 또한 인간 존재의 긍정성과 부정성의 조화에 있다. 프란츠 파농의 말이다. “나는 인간을 긍정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긍정, 사랑에 대한 긍정 그리고 관용에 대한 긍정. 그러나 인간은 부정의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을 경멸하는 것에 대한 부정, 인간이 인간을 비하하는 것에 대한 부정,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부정말이다. 인간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것, 즉 자유를 도살하는 행위에 대한 부정말이다.”(F. Fanon, 위의 책, 278쪽)
리타 그로스(Rita Gross)가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적 실천과 판단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여성의 지위를 깎아 내리므로 모두 부당하다.”(Rita Gross, 김윤성 옮김, 페미니즘과 종교, 청년사, 1999, 133쪽)고 말한 것처럼, 그동안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여성성에 대한 폄하와 폄훼가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균형 있는 양성 평등적 성교육이 평생에 걸쳐 행해져야 한다. 이와 동시에 무엇보다도 성교육을 위한 바탕이 되는 성서를 보는 시각에서도 남성중심주의적 렌즈가 아닌 양성 균형적인 렌즈를 통해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Rita Gross, 위의 책, 149쪽)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남성/여성 혹은 이성애자/동성애자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온전한 참여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Kathy Rudy, 박광호 옮김, 섹스 앤 더 처치, 한울, 2012, 156, 182쪽)
이제 교회 공동체의 과제는 가부장적인 성교육, 혹은 이성애자 중심의 성담론에서 동성애자를 위한 성담론 혹은 양성 평등적 성정치를 구성하기에 적합한 “종교적 표현과 (언어/이미지) 상징”을 어떻게(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중심주의로 일관해 온 성의 권력화가 여성에 의해서 재편되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성정치 구도로 굳어진 성서의 세계관과 충돌되고 있는 것과 교회 공동체 내의 고착화된 시선들(여성성과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종교는 전체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귀가 필요하다. 귀 아닌 귀다... 근대 사람은 듣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이다. 들은 것 없이 말하려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다. 여기 현대 종교가 권위를 잃어버린 이유가 있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서풍의 노래 5, 한길사, 1984, 35쪽)고 말했다. 전체로서의 하느님은 이성애자나 남성들에게만 말씀하지 않으셨다. 들어야 하는 사람은 이성애자나 남성만이 아니다. 동성애자든 여성들이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씨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체로서의 하나님은 물론이거니와 전체로서의 말씀은 남성/여성, 이성애자/동성애자를 초월하여 혹은 포함하여 적용되고 침투되어야 진정한 말씀이다. 여기에 함석헌의 여성 예찬론의 일부를 옮겨본다.
“하늘과 땅의 사이가 되는, 형상 없는 형상인 구름 어디 있을까? 모든 빛깔과 선이 다 녹아 엷어질 대로 엷어져 뚫려 비치는 영광만인, 모든 욕심과 번뇌가 다 식어버리고 오직 평화만이 서편 하늘은 어디 있을까? 젊은 여성의 뱃속, 혼 속 아닐까? 이 인간의 살림의 모든 기쁨, 모든 슬픔, 모든 이상, 모든 소망, 모든 실망, 모든 눈물이, 다시 없이 약하고 다시 없이 느낌 많은 여성의 그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신비론 혼의 용광로를 거쳐, 끓을 대로 끓고, 탈대로 탄 후 무한을 향해 피어올라, 영원의 찬바람을 만나 식으면 그것이 정말 구름이다. 그 속에 새로 올 세대의 가지가지의 환상과 꿈이 들어 있다. 젊은 여성의 가슴 속에 서리서리 서려 있는 이 구름을 타고서야말로 인자(人子)는 올 것이다. 아미타불의 나라는 열릴 것이다. 새 시대의 주인은 올 것이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서풍의 노래 5, 한길사, 1984, 44쪽)
여성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는 함석헌의 지론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성에 대한 시각, 나아가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어찌 가져야 할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해 준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종교적 인간과 성(性/聖)스러운 인간
인간에게 있어서 성(性, sex)이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로인해 성의 즐거움, 쾌락, 생산 등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러한 인체생리학적 구조의 생명체계가 있기 때문에 성은 본능적 욕구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을 단순히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항대립의 구조로만 놓고 본다면, 구별과 구분, 혹은 차별과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 차원의 논의에서 성(性, gender)은 의미가 부여된 성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그런 연유로 한나 아렌트(H. Arendt)가 생물학적 생명인 조에(zoe)와 의미가 부여된 비오스(bios)를 구분했던 것처럼, 여성 혹은 남성들의 역할이든 나아가 동성애자들의 행위이든 인간의 성이란 “기술과 이윤이 지배하는... 동물학적 생명체로 축소”시킬 수 없다. 성은 ‘의미’를 지닌 생명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Catherine Clément/ Julia Klisteva, 임미경 옮김, 여성과 성스러움, 문학동네, 2002, 26-27쪽) 그 의미란 경험 이전의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한 주체가 아니다. 의미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내 이전에 이미 그곳에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며 말이다.”(F. Fanon, 앞의 책, 169쪽)
여기에서 성은 성스러움과 연결이 된다. 그것은 초연함(indifférence, 무관심), 즉 모든 차이를 없애는 다르지-않음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을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항대립의 구조 속에서 봄으로써 성스러움에 근접하는 경계와 금기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 다시 말해서 정결과 오염이라는 양면성 속에서 고민해왔다. 성은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타락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이다. “실수투성․죄의식․죄의식의 거부․편집증 등. 동성애 영역의 뒤편에는 이런 것들이 숨어 있다.”(F. Fanon, 앞의 책, 217쪽) 이렇듯 유독 동성애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교회가 관대하지 못한 것은, 동성애는 신이 창조한 세계 내에서의 근본적인 질서를 와해시키는 성의 일탈을 가져오는 것이며 차이를 부정하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차이의 소멸은 분명히 질서를 교란시키거나 폭력을 낳을 수도 있지만, 그와는 달리 차이를 강조하는 사회나 종교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차별을 합리화하거나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최창모, 금기의 수수께끼, 한길사, 2003, 220-221쪽)
동성애에 대한 교회적 시선이 타협의 여지가 없이 매우 비판적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회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동성애와 같은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동성성교(homogenitality)나 동성성교행위(homogenital acts)라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인식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더불어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종교적 관심사는 성결(정결)이었지 섹스 자체(혹은 동성 간 성행위)의 옳고 그름의 윤리․도덕적 문제가 아니었다(레위 18,22; 로마 1장․14장 참조). 그저 비일상적인(unnatural, para physin[본성을 넘어서는/거슬러; 비정상적인]↔kata physin, 일상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오히려 사도 바울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음식물에 관한 관례, 할례 관습, 성행동의 차이 등 어떠한 성결 요건이나 문화적 차이도 그 자체로는 윤리적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게이나 레즈비언 섹스 자체가 선한지 악한지, 즉 동성 간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분명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성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결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며, 오히려 동성애에 대해서는 일부러 개의치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Daniel A. Helminiak, 김강일 옮김,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도서출판 해울, 2003, 32, 61, 90, 98-100, 142, 202쪽 참조)
이에 “동성애자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완전하게 창조하셨다.”는 한계에 대한 진심어린 수용이다.”(이상억, “동성애자를 위한 돌봄의 목회미학”, 기윤실부설기독교윤리연구소 편,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1, 277쪽) 논의를 좀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 프란츠 파농(F. Fanon)의 흥미로운 표현을 한 번 들어보자. “논란에 논란을 거듭한 끝에 과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흑인도 인간임을 인정했다. 생체내적으로나 생체외적으로 마침내 흑인도 백인에 버금가는 인간이 된 것이다.”(F. Fanon, 앞의 책, 152쪽) 동성애에 대한 반대 논쟁은 결국 성차별의 논쟁이자 인간우생학적(혹은 인종차별적)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몸 안과 밖의 차이의 인정, 앞에서 말한 초연함의 태도는 인간성(性)의 긍정을 통한 인간성(humaness/sacred)의 인정으로 나아가면서 상호주체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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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성공포증으로부터의 탈출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의 해방’이다.( F. Fanon, 위의 책, 230쪽) 남성성을 대변하는 주인과 여성성을 대변하는 노예, 이성성을 대변하는 주인과 동성애적 성 일반을 대변하는 노예의 의식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이다. 또한 인간 존재의 긍정성과 부정성의 조화에 있다. 프란츠 파농의 말이다. “나는 인간을 긍정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긍정, 사랑에 대한 긍정 그리고 관용에 대한 긍정. 그러나 인간은 부정의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을 경멸하는 것에 대한 부정, 인간이 인간을 비하하는 것에 대한 부정,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부정말이다. 인간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것, 즉 자유를 도살하는 행위에 대한 부정말이다.”(F. Fanon, 위의 책, 278쪽)
리타 그로스(Rita Gross)가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적 실천과 판단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여성의 지위를 깎아 내리므로 모두 부당하다.”(Rita Gross, 김윤성 옮김, 페미니즘과 종교, 청년사, 1999, 133쪽)고 말한 것처럼, 그동안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여성성에 대한 폄하와 폄훼가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균형 있는 양성 평등적 성교육이 평생에 걸쳐 행해져야 한다. 이와 동시에 무엇보다도 성교육을 위한 바탕이 되는 성서를 보는 시각에서도 남성중심주의적 렌즈가 아닌 양성 균형적인 렌즈를 통해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Rita Gross, 위의 책, 149쪽)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남성/여성 혹은 이성애자/동성애자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온전한 참여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Kathy Rudy, 박광호 옮김, 섹스 앤 더 처치, 한울, 2012, 156, 182쪽)
이제 교회 공동체의 과제는 가부장적인 성교육, 혹은 이성애자 중심의 성담론에서 동성애자를 위한 성담론 혹은 양성 평등적 성정치를 구성하기에 적합한 “종교적 표현과 (언어/이미지) 상징”을 어떻게(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중심주의로 일관해 온 성의 권력화가 여성에 의해서 재편되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성정치 구도로 굳어진 성서의 세계관과 충돌되고 있는 것과 교회 공동체 내의 고착화된 시선들(여성성과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종교는 전체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귀가 필요하다. 귀 아닌 귀다... 근대 사람은 듣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이다. 들은 것 없이 말하려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다. 여기 현대 종교가 권위를 잃어버린 이유가 있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서풍의 노래 5, 한길사, 1984, 35쪽)고 말했다. 전체로서의 하느님은 이성애자나 남성들에게만 말씀하지 않으셨다. 들어야 하는 사람은 이성애자나 남성만이 아니다. 동성애자든 여성들이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씨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체로서의 하나님은 물론이거니와 전체로서의 말씀은 남성/여성, 이성애자/동성애자를 초월하여 혹은 포함하여 적용되고 침투되어야 진정한 말씀이다. 여기에 함석헌의 여성 예찬론의 일부를 옮겨본다.
“하늘과 땅의 사이가 되는, 형상 없는 형상인 구름 어디 있을까? 모든 빛깔과 선이 다 녹아 엷어질 대로 엷어져 뚫려 비치는 영광만인, 모든 욕심과 번뇌가 다 식어버리고 오직 평화만이 서편 하늘은 어디 있을까? 젊은 여성의 뱃속, 혼 속 아닐까? 이 인간의 살림의 모든 기쁨, 모든 슬픔, 모든 이상, 모든 소망, 모든 실망, 모든 눈물이, 다시 없이 약하고 다시 없이 느낌 많은 여성의 그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신비론 혼의 용광로를 거쳐, 끓을 대로 끓고, 탈대로 탄 후 무한을 향해 피어올라, 영원의 찬바람을 만나 식으면 그것이 정말 구름이다. 그 속에 새로 올 세대의 가지가지의 환상과 꿈이 들어 있다. 젊은 여성의 가슴 속에 서리서리 서려 있는 이 구름을 타고서야말로 인자(人子)는 올 것이다. 아미타불의 나라는 열릴 것이다. 새 시대의 주인은 올 것이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서풍의 노래 5, 한길사, 1984, 44쪽)
여성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는 함석헌의 지론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성에 대한 시각, 나아가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어찌 가져야 할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해 준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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