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6/11 00:16]에 발행한 글입니다.
“삶은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수용자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상식적인 견해와 모자라는 지혜, 뒤떨어진 정보의 뒤범벅뿐이다...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는 비유적(figurative)이다. 언어는 고유의 의미, 본질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이자 청자인 우리들은 이를 자꾸만 잊어버린다.”(Marshall Blonsky, “개설: 기호학의 고민, 기호학의 재평가”, Marshall Blonsky 엮음, 곽동훈 옮김, 베일 벗기기, 시각과 언어, 1995, 43쪽)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언어의 규칙이요, 후자는 언어의 행위이다.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회적 성격의 랑그는 다시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e)로 나눈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란 콘텍스트(context)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는 콘텍스트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꽃이라는 기표는 사랑, 화해, 축하, 감사 등 그 기의가 무한히 확장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기호는 발신자보다 수신자의 콘텍스트 속에서 신뢰를 얻는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산출한 결과는... 우선 기호는 실체가 아니라 두 가지 차이군의 상관관계라는 것이다(곳치히). 그것은 인식의 표시기이며 표현이자 기표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에 의해서 그 문화의 내용들의 항목들(기의, 그 내용의 형식)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 결과 약호의 이론과 기호생산 이론이 나온다. 즉 의미화작용 체계의 이론,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이론, 심지어 대중조작 장치의 이론까지 등장하게 된다(에코). 여기에 빠진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순수한 기호가 아니라는 점, 즉 언어 역시 하나의 사물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음성, 즉 물질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부분적으로 대상(object)이며 부분적으로는 기호이다.”(Marshall Blonsky, “개설: 기호학의 고민, 기호학의 재평가”, Marshall Blonsky 엮음, 곽동훈 옮김, 베일 벗기기, 시각과 언어, 1995, 24)
마찬가지로 ‘원자력’이라는 언어적 개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 고통과 죽음이라는 기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원자력이 아무리 우리의 과학기술과 문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단순히 기표가 주는 이기(利器)만 좇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는 끊임없는 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기호를 발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기호가 품고 있는 기의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호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 기호 자체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고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있다면 미래를 향한 스펙터클(spectacle)한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들 그 의미와 가치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원자력이란 핵이라는 기표적 성격을 더불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가 가진 폭력성과 의존성(편리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원자력이라는 기표는 마치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자연적 메시지(natural message)인 양 자신의 기의를 숨긴다. 거기에는 정부가 시각적 양식이나 상징인 엠블럼(emblem)을 통해 국민을 기만한다. 기호가 갖고 있는 이중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경고의 엠블럼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안심의 엠블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로써 수신자는 자신이 받은 기호를 해독하는 매우 비판적인 해석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스펙터클한 메시지를 수신자에게 내보낸다. 어쩌면 원자력 발전소 자체가 국민들에게 일정한 신화와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면 천국이 지연될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간의 에너지 지속성, 영원한 진보(발전)라는 미명 아래 기호 발신의 에토스에는 관심조차도 없다. 게다가 국민들은 원자력이 갖는 마나(Mana)에 국민들이 쉽게 빠져들고 그 힘에 굴복하고 만다. “세계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기호라고 보는 기호학은 우리에게 모든 사실에, 그리고 가장 세속적인 사실에도 천착할 필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냐?”하고 물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인들이 모든 나무와 냇물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었듯이 우리의 짐꾸러미, 광고, 정치 슬로건, 자연을 대체해버린 우리의 일상용품들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드 세르토).”(Marshall Blonsky, 위의 책, 41쪽)
이처럼 기호는 국민을 기만하고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며 현상을 속인다. 원자력이라고 하는 기호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문자, 개념, 표정, 그림, 매체 등에서 발생하는 편리성 이면의 위험성과 무책임성, 심지어 죽음이라는 의미를 간파할 수 있어야만 원전에 대한 신화를 접을 수 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기호학은 오늘날... 무언가를 표명하지 않는 실체, 우리를 조정하지 않는 약호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한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77쪽)는 사실이다. 방사능, 원전 폐기물, 핵전쟁 등 온갖 최악의 가능성들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의 기호는 수신자인 우리를 조작하여 원전의 과잉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호가 가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기호학은 모든 기호들이 겉보기에 가리키는 것들(단어들, 이지미들, 기호들)보다는 개인들이나 그들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즉 겉보기와 내용이 다른 것, 가려져 있는 비밀 등을 간파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파워엘리트는 읽고 있다. 상업, 오락, 저널리즘, 정부 등에 포진하고 있는 강력한 거물들에게는 강한 자들을 위한 보고서와 초안들, 토론, 결정-언어, 랑가주(langage)-이 있다. 그 언어는 조용한 방에서 발화되고, 물론 치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치장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한참 멀어져서 온갖 화상들(그림, 텔레비전, 아름다운 필체, 잡지, 예술 등)로 승화된 것이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53, 75쪽)
자크 라캉(J. Lacan)의 논리를 빌린다면 기호란 상상계(the Imaginary)에 불과하다. 의미(작용)가 아닌 가벼운 최면 상태에 홀린 마비상태에 있는 것처럼 현실과 미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전력을 소모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겠다면 그 실재계(the Real)는 무리와 무지 앞에 황망하게 무너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지금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위한 아고라(agora)가 왜 필요한가?’ ‘원전 가동 중단, 원전 비리, 전력 위기 등의 그 담론이 의미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더불어 함석헌의 기술문명에 대한 우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광풍이 한 번 노하기만 하면 기술 어디로 갔는지 지식 어디로 갔는지 경험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조차 없고 모양은 일변하여 버린다. 그리하여 맘대로 이용한다던 바람은 인제는 맞출 수도 없고 도리어 그 폭위(暴威)하에 전연 굴복하여 그 하는 대로 맡겨두고 밀려갈 수밖에 없어진다. 소위 문명의 힘을 가지고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대개 이러한 것이다... 지식을 믿던 인간의 지식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기술을 믿던 인간의 기술이 끝이 나는 날은 저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날이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해와 별이 없어져서가 아니다.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믿던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 그전에 모든 사물 모든 이치를 그렇게 똑똑히 보노라고 자랑하던 교만한 눈이 그 안광을 잃어버린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48-49쪽)
이에 미셸 푸코(M. Foucault)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을 이렇게 말한다.
“자신만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영혼, 자신의 생각, 자신의 행동 등에 영향을 끼치는 기술, 그리하여 자신을
변형시키고 자신을 수정하여 어떤 완벽, 행복, 순수, 초자연적 힘의 상태를 얻는 기술이 있는 것... 이 자아 테크놀로지는 진실과 관련된 어떤 사항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를 배우는 것, 진실을 발견하는 것, 진실을 깨우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M. Foucault, “섹슈얼리티와 고독”, Marshall Blonsky 엮음, 위의 책, 168쪽)
따라서 그가 주장한 ‘자아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원자력에너지의 조작인식, 핵에 대한 의존인식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삶을 조망하고 탈핵에 근거한 생태적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정부와 세계, 그리고 원전자본의 기호적 조작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원자력의 기호(sign)와 자기 테크놀로지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언어의 규칙이요, 후자는 언어의 행위이다.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회적 성격의 랑그는 다시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e)로 나눈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란 콘텍스트(context)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는 콘텍스트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꽃이라는 기표는 사랑, 화해, 축하, 감사 등 그 기의가 무한히 확장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기호는 발신자보다 수신자의 콘텍스트 속에서 신뢰를 얻는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산출한 결과는... 우선 기호는 실체가 아니라 두 가지 차이군의 상관관계라는 것이다(곳치히). 그것은 인식의 표시기이며 표현이자 기표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에 의해서 그 문화의 내용들의 항목들(기의, 그 내용의 형식)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 결과 약호의 이론과 기호생산 이론이 나온다. 즉 의미화작용 체계의 이론,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이론, 심지어 대중조작 장치의 이론까지 등장하게 된다(에코). 여기에 빠진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순수한 기호가 아니라는 점, 즉 언어 역시 하나의 사물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음성, 즉 물질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부분적으로 대상(object)이며 부분적으로는 기호이다.”(Marshall Blonsky, “개설: 기호학의 고민, 기호학의 재평가”, Marshall Blonsky 엮음, 곽동훈 옮김, 베일 벗기기, 시각과 언어, 1995, 24)
마찬가지로 ‘원자력’이라는 언어적 개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 고통과 죽음이라는 기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원자력이 아무리 우리의 과학기술과 문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단순히 기표가 주는 이기(利器)만 좇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는 끊임없는 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기호를 발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기호가 품고 있는 기의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호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 기호 자체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고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있다면 미래를 향한 스펙터클(spectacle)한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들 그 의미와 가치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원자력이란 핵이라는 기표적 성격을 더불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가 가진 폭력성과 의존성(편리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원자력이라는 기표는 마치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자연적 메시지(natural message)인 양 자신의 기의를 숨긴다. 거기에는 정부가 시각적 양식이나 상징인 엠블럼(emblem)을 통해 국민을 기만한다. 기호가 갖고 있는 이중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경고의 엠블럼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안심의 엠블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로써 수신자는 자신이 받은 기호를 해독하는 매우 비판적인 해석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정부는 원자력
이처럼 기호는 국민을 기만하고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며 현상을 속인다. 원자력이라고 하는 기호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문자, 개념, 표정, 그림, 매체 등에서 발생하는 편리성 이면의 위험성과 무책임성, 심지어 죽음이라는 의미를 간파할 수 있어야만 원전에 대한 신화를 접을 수 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기호학은 오늘날... 무언가를 표명하지 않는 실체, 우리를 조정하지 않는 약호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한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77쪽)는 사실이다. 방사능, 원전 폐기물, 핵전쟁 등 온갖 최악의 가능성들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의 기호는 수신자인 우리를 조작하여 원전의 과잉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호가 가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기호학은 모든 기호들이 겉보기에 가리키는 것들(단어들, 이지미들, 기호들)보다는 개인들이나 그들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즉 겉보기와 내용이 다른 것, 가려져 있는 비밀 등을 간파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파워엘리트는 읽고 있다. 상업, 오락, 저널리즘, 정부 등에 포진하고 있는 강력한 거물들에게는 강한 자들을 위한 보고서와 초안들, 토론, 결정-언어, 랑가주(langage)-이 있다. 그 언어는 조용한 방에서 발화되고, 물론 치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치장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한참 멀어져서 온갖 화상들(그림, 텔레비전, 아름다운 필체, 잡지, 예술 등)로 승화된 것이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53, 75쪽)
자크 라캉(J. Lacan)의 논리를 빌린다면 기호란 상상계(the Imaginary)에 불과하다. 의미(작용)가 아닌 가벼운 최면 상태에 홀린 마비상태에 있는 것처럼 현실과 미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전력을 소모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겠다면 그 실재계(the Real)는 무리와 무지 앞에 황망하게 무너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지금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위한 아고라(agora)가 왜 필요한가?’ ‘원전 가동 중단, 원전 비리, 전력 위기 등의 그 담론이 의미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더불어 함석헌의 기술문명에 대한 우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광풍이 한 번 노하기만 하면 기술 어디로 갔는지 지식 어디로 갔는지 경험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조차 없고 모양은 일변하여 버린다. 그리하여 맘대로 이용한다던 바람은 인제는 맞출 수도 없고 도리어 그 폭위(暴威)하에 전연 굴복하여 그 하는 대로 맡겨두고 밀려갈 수밖에 없어진다. 소위 문명의 힘을 가지고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대개 이러한 것이다... 지식을 믿던 인간의 지식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기술을 믿던 인간의 기술이 끝이 나는 날은 저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날이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해와 별이 없어져서가 아니다.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믿던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 그전에 모든 사물 모든 이치를 그렇게 똑똑히 보노라고 자랑하던 교만한 눈이 그 안광을 잃어버린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48-49쪽)
이에 미셸 푸코(M. Foucault)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을 이렇게 말한다.
“자신만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영혼, 자신의 생각, 자신의 행동 등에 영향을 끼치는 기술, 그리하여 자신을
따라서 그가 주장한 ‘자아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원자력에너지의 조작인식, 핵에 대한 의존인식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삶을 조망하고 탈핵에 근거한 생태적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정부와 세계, 그리고 원전자본의 기호적 조작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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