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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가상(假象)의 생철학적 기적과 실존적 의미 서사(1)

by anarchopists 2019. 10.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7/08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가상(假象)의 생철학적 기적과 실존적 의미 서사(1)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답해야 한다.”(Viktor E. Frankl, 박현용 옮김,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205쪽)



종교적 서사(narrative)가 어떤 기적을 규명·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종교현상과 종교체험은 기적의 연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가 초월적인 존재에게 염원하는 바를 발원하면 자연 질서 속에서 강력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물음보다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관심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기적에 대한 근본물음, 즉 ‘기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보다는 사적 관심, 사적 이익에 따라 개인의 신변을 유리한 쪽으로 변경하기 위해서 초월적 존재에 발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우만(Z. Bauman)은 이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논리학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 때문에 신을 필요로 합니다. 신의 투명성과 일상적 모습 때문이 아니라 불가사의함과 예견 불가능성 때문에 말이죠. 사건들의 흐름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이죠. 사물들의 질서에 노예적으로 복종하는 대신-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며, 또 대부분의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지요-그것을 한 켠으로 밀어젖힐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행동 능력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저 모든 무시무시한, 겉보기로는 감각이 없고 말이 없는 맹목적 힘들을 설명하고, 바라기로는 길들이고 순치시키기 위해서입니다.”(Z. Bauman, 조형준 옮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새물결, 2014, 227쪽)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은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적의 의미는 ‘어떻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적을 많이 행한대도 그것으로 인간의 건강문제, 경제문제, 정치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것으로 어떤 뜻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한길사, 1985, 355쪽) 기적은 이유와 까닭의 문제요, 뜻의 문제라는 겁니다. 기적을 행하는 자가 발원하는 자를 위해서 마음껏 자기 실력과 능력을 뽐내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종교적 기적의 서사는 도대체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 혹은 어느 정도 바랐던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분명한 뜻이 있게 마련입니다. 로고테라피(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이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Viktor E. Frankl, 박현용 옮김,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79쪽)라고 받아들인다면, 기적에는 궁극적인 어떤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는 “초월적인 의미”로서 기적과도 같은 운명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서사는 이미 의미 연관 구조 속에서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적 서술과 기적 고백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치 삶에서 뜻이 현현한다면, 삶에 뜻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기적의 서술은 삶의 뜻을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빅토르 프랑클이 생사가 오가는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삶의 의미와 해답을 찾으면서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살아야 할 의지는 삶의 뜻을 발견할 때 매순간 기적 같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의 이야기를 더 들어봅시다.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낡은 질서 속에 평안하다 하고 있다가 말라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깨치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미 있는 질서가 깨지면 사람은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새 시대가 열리고 그 새 시대에 맞추려면 노력하게 되고 그 노력 가운데 역사의 진보가 있어 생명은 일단 높은 데 가게 됩니다.”(함석헌, 앞의 책, 356쪽) 그가 말하는 속뜻은 기적이란 종래의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 생명의 질서, 진보의 질서를 전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 현 질서를 고수하려 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깨우쳐 꿰뚫고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뜻, 새로운 의미를 위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의지를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소이연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 체제와 질서 속에서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질서란 한번 만들어지면 좋은 것도 있지만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들이 있어서 결국 구속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생명의 진보와 생명의 진화가 멈추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근본 질서는 너, 나, 네 것, 내 것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쓰면 없어진다, 네 것은 네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라는 그대로가 진리가 아니다 하는 것을 알려주자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57쪽) 질서는 구분, 구별, 차별로 치닫게 됩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볼 때, 질서가
계급을 정당화하고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며 통제를 가장한 폭력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설령 그것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종래의 질서를 개혁하려는 의지와 행동이 좌절되곤 합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71쪽) 그러므로 기적은 그러한 것들을 뒤집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기적 서사/사화가 말하는 것은 단지 자연 질서를 역행하는 비과학적 서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적은 철저하게 삶의 왜곡된 현상에 대해서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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