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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욕망 주체의 욕망, 그리고 정치적 정의(正義)와 봉사

by anarchopists 2019. 10.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6/20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욕망 주체의 욕망, 그리고 정치적 정의(正義)와 봉사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동일화’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일정한 모델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동일시의 모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하며 아버지처럼 존재하고 아버지를 대신하려고 하면서 아버지를 이상화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욕망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욕망하려는 것을 욕망합니다. 이른바 욕망의 모방이자 모방의 욕망입니다(R. Girard, 김진식·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1993, 254-257쪽). 그런데 여기서 주체의 욕망은 아버지가 욕망하는 것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의 욕망 대상은 곧 어머니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자아는 욕망의 주체에게 명령합니다. ‘너의 모델인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어라. 너의 모델인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지 마라.’ ‘그가 하는 모든 것을 하지 마라. 많은 것들은 오직 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고 타부를 강화함으로써 주체의 초자아를 발달시킵니다(R. Girard, 위의 책, 267-270쪽).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토대로 그녀/그의 욕망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녀/그의 욕망은 모방된 것이고 학습된 것이고 전염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욕망을 주체 욕망과 동일시함으로써 자발적 욕망이 아닌 비자발적 욕망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성적 리비도는 모방본능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그의 초자아는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여서 아버지의 금기사항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모델처럼 되라.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어라. 모델처럼 되지 마라. 너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지 마라.’ 그러면서 그녀/그는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외칩니다(R. Girard, 위의 책, 265쪽). 아버지의 욕망을 마치 주체 욕망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완벽하게 동일시합니다. 심지어 그녀/그는 폭력의 욕망마저도 주체 욕망으로 받아들입니다. 폭력을 은폐시키려고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그녀/그는 오히려 폭력도 모방을 하고 맙니다.


아버지의 욕망 대상은 어머니이지만, 어머니는 애초에 주체 욕망의 욕망이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욕망 대상을 공유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 욕망은 ‘찬탈의 욕망’을 숨기지도, 포기하지도 못하고 마침내 쟁취하고 맙니다. 그녀/그의 욕망은 국가 권력, 정치적 욕망이었음이 드러났고, 폭력의 모방은 현실적인 폭력으로 나타났습니다(R. Girard, 위의 책, 261, 495쪽). 그러나 그녀/그는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금지 명령을 일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하는 것 모두를 하지 마라. 많은 것들은 오직 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설령 그녀/그가 아버지의 모방 본능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하나 완전히 아버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녀/그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녀/그를 보고 아버지의 현현이라 해도 완벽한 모방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모방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욕망 주체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많은 것들은 오직 그(아버지)에게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만 속해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은 영원한 타부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금기로 남겨 놓으라는 명령을 어길 경우 남는 것은 좌절, 비통, 그리고 죽음입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아버지가 죽고(아버지를 죽이고) 난 이후에 법에 복종을 합니다. 아버지는 법을 대표합니다. 그럼에도 아이의 관심을 좌절시키는 아버지는 거세로 위협하는 존재나 경쟁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녀/그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의 차이로 (정치적) 의식의 자율성, (정치적) 행위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김경순, 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 한국학술정보, 2009, 32, 43쪽).


금기가 금기인 것으로 확인되는 순간은 이성의 간지(理性의 奸智, List der Vernunft)에 의해서입니다. 헤겔(G. W. F. Hegel)은 세계정신, 즉 이성은 자신의 역사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욕망에 사로잡힌 한 개인을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성의 그 목적을 다 달성하게 되면 그 개인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성의 간교한 지혜입니다. 아버지의 욕망을 주체 욕망으로 동일시해서 국가 권력과 정치 욕망으로 발전시킨 것은 분명한 모방 본능이지만, 역사의 어느 순간 이성은 그녀/그의 욕망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탁월한 역사가 마이네케(F. Meinecke)는 국가 권력이란 “한 민족이 생존하기 위한 물질적 요구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인류 최고의 정신적·영적인 가치, 즉 문화와 종교에 대해 보일 수 있는 봉사를 통해서만 정당화된다.”고 말하면서 국가의 이념(윤리)가 현실(권력)이 종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F. Meinecke, 이광주 옮김, 국가권력의 이념사, 한길사, 2010, 19, 38쪽). 봉사와 윤리. 국가 권력은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봉사와 윤리적 실현에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국가 권력의 수장은 수확자가 아닙니다. 역사 전체로 보자면 권력자는 민중과 함께 씨를 뿌리는 자입니다. 좋은 씨를 선택해서 좋은 땅에-혹여 척박한 땅이라 할지라도-파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두는 것은 그녀/그의 몫이 아니라, 주재자[민중]의 몫입니다. “역사는 수확의 역사가 아니요 파종의 역사다. 그리고 기약 없이 물 위에 파종하는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4, 311쪽). 이처럼 파종할 자가 수확자까지 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요 욕망주체의 바깥 영역입니다. 역사의 긴 시간, 촘촘히 씨줄과 날줄이 얽혀져서, 사건과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파종한 것들이 하나 둘씩 수확이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당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역사에서 욕심은 금물입니다. 모두가 파종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우리의 수확은 영원하고 무한한 값을 가진 것이다.”라고 말했는지 모릅니다(함석헌, 위의 책, 311쪽).


파종자는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이 대담! 영원의 추수일을 기다리는 이 근기! 전우주과정으로써 일장의 승부로 삼은 이 웅대!”가 필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머지는 주재자[민중]에게 맡겨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11쪽). 오직 파종자는 “정의”를 욕망해야 합니다. 민중과 함께 파종하는 자의 정의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정의를 찾는 자가 종국에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25쪽). 하지만 그러기에 파종자는 더욱 더 정의에 바탕 위에 서서 정치를 해야 합니다. 정의는 민중을 편드는 것입니다. 파종자는 민중과 더불어 정의를 파종하고 실현하는 민중의 봉사자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함석헌은 이렇게 고발합니다. “네 양심은 마비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정의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사회를 본다면 이 건국을 끓이노라 부글부글하는 이 가마 속을 들여다본다면 적어도 부정의가 어디 있는 것은 보았어야 할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325-326쪽). 파종자(욕망 주체)는 양심성찰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눈살펴야 합니다. 데면데면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구석구석, 나라 구석구석에 부정의가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욕망 주체는 자신을 아버지의 화신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폭력의 전염성과 모방도 성적 리비도로서의 모방 본능 안에 각인되어 폭력적 정치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정의에 눈을 감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사회적 부정의로 일관한다면 역사의 파종은 고사하고 존재자인 민중에 의해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의 존재란 바로 그것이 ‘나타나는’ 것”(Jean 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12쪽)입니다. 민중은 욕망 주체의 병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바 양심, 존재하는바 정의가 그녀/그의 나타
남이기를 원합니다. 그녀/그는 민중이 나타내기를 원하는 바를 나타내야 합니다. 욕망 주체의 욕망 대상과 민중의
욕망 대상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욕망 주체의 욕망과 아버지의 욕망을 동일시해서 마치 민중이 그 욕망을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 욕망으로 호도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민중 역시 자기가 나타내기를 바라는 정치 본질의 현상과 아버지의 욕망이 동일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폭력과 희생도 우매한 민중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정치현상의 수확자는 민중을 어리석은 희생양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민중은 정말 그녀/그가 민중을 위해서 봉사하고 정의를 구현하려고 애를 쓰는지, 헌법에 기초하여 파종하는지를 감시하고 또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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