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논단15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태아나키즘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3/03 06:26]에 발행한 글입니다. [제3회 함석헌평화포럼 학술발표문-김대식] StartFragment 인간의 세계 경험과 인식의 성찰, 그리고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태철학4. 삶의 세계에 대한 생태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새로운 시선 읽기 “지배․피지배 속에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저작집2, 한길사, 2009, 101-109. 그러면서 샤르댕(Pierre Th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적 영성에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생명이란 모름지기 끊임없이 반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저항은 곧 나라는 존재가 스스로 나이기 위.. 2019. 12. 27.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태아나키즘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3/0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제3회 함석헌평화포럼 학술발표 글-김대식] 인간의 세계 경험과 인식의 성찰, 그리고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태철학 자본주의의 물신주의를 비판하고 그 자본에 노예가 되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자기 결정과 자유, 그리고 지배자의 굴레에 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맘몬제일에 젖어 있는 인간이 그 맘몬을 위해서는 자연의 자유를 빼앗아도 된다는 폭력적 사고와 행위가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인간의 정신적 진보를 방해하는 장벽을 꿰뚫고 나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인간에게 자신을 자각하게 해주는 유일한 철학이다... 아나키즘은 인간을 포로로 묶어둔.. 2019. 12. 27.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강론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1. 설교(강론)는 해석학이다! 교회나 성당에서 설교자(혹은 강론자)가 성서를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를 해준다는 것[해석]은 지난한 일이다. 게다가 성서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신이 인간에게 한 말, 즉 계시라는 점에서 설교자로 하여금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 행간과 행간, 자간과 자간 사이를 읽어내는 것은 하나의 능숙한 기교(techne)와 기술(art)이 필요하다. 2천년을 훌쩍 넘긴 고대 문서에는 신이 인간에게 말하고자 한 자신의 이야기가 스며있기 때문에 문자로만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설교자나 주석가는 당혹스럽다. 하지만 성서는 .. 2019. 12. 16.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2019. 12. 16.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소통은 설교자의 에토스에서 발생한다. 4. 설득과 소통을 위한 설교자(강론자)의 에토스 지금까지 우리는 수사학의 역사나 형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수사학은 언어를 통한 논증과 진실성의 전달, 설득 등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들어 그리스도교 신학의 성서해석학이나 설교 형식에서 수사학이라는 학문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신학에서 성서해석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나, 수사학이라는 어떤 일부분의 요소만 차용하여 해석학이나 설교에 접합하겠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 발상이다. 그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완전히 소화가 되고 훈련이 되어서 그 본래적인 .. 2019. 12. 16.
폭력의 이데올로기 앞에 무너져가는 사회를 보면서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12 01:01]에 발행한 글입니다. 동정하는 사회가 행복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에서 지나친 합리성도 문제이지만 동정 없는 감성은 한낱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자아로 나타날 수 있다. 동정이란 내가 타자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 즉 공통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동정이나 연민조차도 이미 추락해버린 이성에 동승시키면서 자위(自慰)를 하고 있다. 윤리나 도덕을 말하면 교조적이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고리 타분한 선비라고 치부해버리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그저 멀리서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비겁한 이성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에 아파하고만 있다. 드러내놓고 같이 아파하고 얼굴을 맞대고 고통의 자아를 달래주고 감싸주기 보다는 견뎌내기 힘든 현실.. 2019.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