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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논단

폭력의 이데올로기 앞에 무너져가는 사회를 보면서

by anarchopists 2019. 11. 2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1/12 01:01]에 발행한 글입니다.

동정하는 사회가 행복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에서 지나친 합리성도 문제이지만 동정 없는 감성은 한낱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자아로 나타날 수 있다. 동정이란 내가 타자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 즉 공통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동정이나 연민조차도 이미 추락해버린 이성에 동승시키면서 자위(自慰)를 하고 있다. 윤리나 도덕을 말하면 교조적이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고리 타분한 선비라고 치부해버리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그저 멀리서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비겁한 이성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에 아파하고만 있다. 드러내놓고 같이 아파하고 얼굴을 맞대고 고통의 자아를 달래주고 감싸주기 보다는 견뎌내기 힘든 현실에 대해서 외면하고 온갖 파괴적 대상에게 자신의 상처를 투사한다.


 
이래서야 사회 전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사르크스(sarx)적 행복에 도취될 때 사회 전체의 행복은 오히려 경감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동정이나 연민을 단순히 윤리로 치부하고 말 사안이 아닌 듯싶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 Badiou)에 의하면, “윤리는 올바른 ‘존재 방식’의 추구, 또는 행위의 지혜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명백히 보여지는 현실은 이기주의의 광란과 해방적 정치의 소멸, 또는 극단적 불안정성, ‘민족적’ 폭력의 증가, 그리고 야만적인 경쟁의 보편성”이다(A. Badiou,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7쪽, 17쪽). 윤리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다르지 않다. 또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행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바디우의 좀 더 정확한 해석을 다시 한 번 인용하여 말한다면, “윤리란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 능력이자 동시에 판단의 궁극적 원리, 특히 정치적 판단의 궁극적 원리로 간주된다. 이때 판단의 궁극의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이다(같은 책, 15쪽).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 능력”, 우리는 지금 이러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학교의 폭력이든, 사회적 폭력이든, 정치적 폭력이든, 이데올로기의 폭력이든, 신자유주의의 폭력이든 이기주의의 광란과 야만적인 경쟁의 보편성으로는 윤리를 회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한 인간 본연의 동정과 연민은 사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이 세계에-있음, 혹은 세계-내-존재라고 할 때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윤리가 담보되지 않으면 영원한 퇴락
과 추락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시궁창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함석헌은 인간의 심연에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동정과 연민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류가 자신과 똑같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해탈의 한 방식으로서 자신을 초월함과 동시에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동정심, 동정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목숨을 받아가지고 나온 이상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 살게 마련입니다. 까닭을 알거나 모르거나 절대의 명령이 거기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라고 합니다. 선의 뿌리를 내가 다할 수 없고 악의 씨를 내가 능히 다 없애버릴 수는 없으나 선을 선으로 알고 악을 악으로 아는 것은 설명할 필요 없이 스스로 환한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 숨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일”(함석헌전집9,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2, 한길사, 2009, 19쪽)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존재하는가?’ 라는 다소 도발적인 물음에 대해서 멈칫거리며 답변이 궁색해지는 이유는 내 자신 안에
서 스스로를 밝히고 있는 바로 그것, 혹은 윤리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폭력적 타자에 의해서 무뎌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그 존재적 기반은 윤리적 이성이 ‘밝은 것’, ‘환한 것’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윤리적 이성은 타자에 대해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통스러워하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기뻐하는 공감적 자아, 동정적 자아의 지속적 계몽이다. 동정을 갖게 되는 동기는 타자의 고통과 슬픔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행복과 상반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낱말이 품고 있는 의미는 ‘함께’ 혹은 ‘같이’라는 공동체성과 연대 의식, 인류라는 하나의 공통적 인식과 삶을 가정하기 때문에 행복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타자의 불행 의식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포용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의 실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고 하는 그 의식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서 사회 전체가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한 논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불어 불행이 존재하는 것은 동정과 연민을 통해서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재 방식과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위 이미지들은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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