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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병상 박사 환경칼럼

휴식의 가치를 알자- 동물도 휴식이 필요하다

by anarchopists 2019. 12.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5/12 07:09]에 발행한 글입니다.


동물들의 빼앗긴 휴식

1980년대 초반 3월의 오대산 월정사 입구, 국립공원 하면 생각나는 승용차 빼곡한 주차장, 호객행위 시끄러운 식당, 똑같은 물건이 진열된 기념품점, 여느 러브호텔과 분위기가 흡사한 여관…. 천편일률의 집단시설지역으로 어지러운 지금과 달리, 비교적 한가롭던 시절의 이야기다. 실험 재료로 사용할 북방산개구리를 산 채로 채집하기 위해 찾은 오대산 월정사 인근의 논과 밭은 하얀 눈이 그대로였다. 며칠 전, 산란 중인 북방산개구리를 포천군에서 채집했기에 찾았건만, 오대산은 아직 한겨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천 가를 발을 쿵쿵 구르며 걸어보지만 두꺼운 얼음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정도 충격으로 바위 밑에서 동면 중인 북방산개구리가 깨어날 성싶지 않았다. 이미 여관도 잡았고, 하릴없이 터벅터벅 올라가는데 저만치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로 떠들썩하게 일감 벌이는 것이 보인다. 가까이 가니 대여섯 명의 동네 청년들이 개구리 잡기에 한창이었다.

먼저 5파운드 해머를 내리쳐 얼음을 깨면 지렛대를 쥔 사내들이 달려들어 커다란 바위를 들썩들썩 올리고, 바위 바로 아래 준비하고 있던 청년은 한 두 박자를 지나 족대를 번쩍 들어올린다. 청년들의 시선은 잠시 족대에 몰리고, 족대에 실린 토실토실한 북방산개구리를 뒤따르는 양동이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 해머는 다시 얼음을 깬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상류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들에게 우리는 협상을 구했다. “돼지고기 값 쳐드릴 테니 20마리만 얻읍시다.” ‘안 그러면 고발할 수도 있어!’ 라는 식의 고압적 자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린 당신네들하고 그런 거래 안 해요!” 우리의 제안을 쌀쌀맞게 거절한 그들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여장을 푼 단골여관의 마당에 동네 잔치 한마당을 준비했다. 어느 틈에 마련했는지 시뻘건 숯불 위에 커다란 석쇠가 펼쳐있고, 소주에 묵은 김치 대기해 놓은 남녀노소들이 툇마루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침을 삼키며 기다리는 게 아닌가.

추운 날씨 탓에 꾸물거리던 양동이 가득한 북방산개구리를 마당 저편 뜨끈뜨끈한 물이 담긴 커다란 함석 대야에 한꺼번에 쏟아 붓자, 본능적으로 수영 스타트 자세를 취하던 개구리들은 그 상태로 죽고, 건져 올린 개구리는 바로 석쇠로 눕힌다. 이렇게 ‘한겨울의 진미’ 북방산개구리는 잔칫상의 주인공이 된 것이고, 처음엔 당당하게 나중엔 비굴하게 몇 마리 얻자며 아까부터 졸졸 따라온 우리(여관 손님)에게 그들은 잘 익은 놈으로 한 마리씩 권한다.

겨우내 쌓인 눈으로 길이 막히면 저장해두었던 강냉이와 감자로 허기를 때우다 꺼칠해진 산골 주민들은 얼음이 약해지길 기다렸다가 광에서 지렛대 해머 족대를 들고 마을 앞 시내로 나갔다. 당시의 월정사 인근 토박이에게 3월의 북방산개구리는 보양효과 그만이었겠지만, 산간 구석구석까지 삼겹살과 고등어자반이 지천인 요즘, 북방산개구리는 얼음이 쨍쨍한 한 겨울부터 수난의 대상이다. 포크레인을 동원 온 계곡을 거덜내는 업자들로 인해 가마니 가득 사로잡힌 북방산개구리는 허우대 멀쩡한 기름진 사내들의 보신용으로 동이 날 지경인 것이다.

변온동물인 개구리에게 동면은 생존을 위한 도피인 동시에 새 생명을 위한 준비기간이다. 가을 녘 포식으로 몸 안에 지방질을 충만한 채 동면에 들어간 개구리들은 겨우내 암컷은 알을, 수컷은 정자를 만든다. 개울 주변의 큰 나무뿌리 아래 떼를 이뤄 동면하는 도롱뇽도 마찬가지요, 바위틈 깊숙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는 뱀들도 그렇다. 그들에게 동면은 단순한 휴식이라기보다 재생산을 위한 준비기간인 것이다. 물론 변온동물만이 동면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젖먹이 동물인 곰이나 너구리도 따스한 동굴에서 동면을 한다. 동면에서 깨어나 새 생명을 준비하는 것 역시 똑 같다.

체온이 일정하여 영하의 날씨를 견딜 수 있고 겨울에도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동물들은 굳이 동면을 하지 않는다. 나무뿌리나 마른 풀도 마다하지 않는 멧돼지와 노루와 토끼들은 나무가 앙상한 하얀 겨울에 모습을 더 잘 드러내, 때를 기다리던 사냥꾼의 총부리를 자극하고, 따뜻한 지방으로 이동하는 철새와 달리 양지바른 곳으로 날아가는 참새와 박새와 곤줄박이들도 동면을 마다한다. 그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수시로 쉰다.

휴식기간이 따로 없는 동물도 있다. 휴식이 없다기보다 쉴 틈이 없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그들은 부스럭거리는 사방을 늘 경계한다. 초식동물들이 대개 그렇다. 휴지기 없는 암세포가 성장 없이 세포분열만 왕성히 하다 결국 자신의 생명마저 금새 재촉하듯, 다음을 편히 준비하지 못하는 동물은 대개 단명한다.

잠들기 전 칭얼대던 막내는 아침이면 쌩긋 웃으며 일어나 안긴다. 그래서 그런가, 사람은 오래 산다. 한쪽 다리를 접고 머리를 가슴 깃에 얹은 채 불안스레 쉬는 두루미나 황새도 휴식이 길다. 그들도 오래 산다. 물 속에서 눈 뜬 채 가슴지느러미만 살금살금 떨며 자는 붕어와 잉어가 오래 사는 이유, 다 거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모든 동물은 평생 대략 2억 번 숨을 쉰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예외적으로 6억 번 숨을 쉰다. 사람은 원래부터 다른 동물의 세배나 숨을 쉬었을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였겠지만 두 다리로 일어서면서, 멀리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숨을 멀리 쉴 수 있게 되면서, 지능이 높아지면서, 다른 동물의 휴식을 빼앗아와 그렇게 되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휴식공간을 배타적으로 확장하면서 사람만은 6억 번 숨을 쉬게 된 것일지 모른다.

요즘 제명에 못산다는 사람들이 많다. 남의 속을 잔뜩 긁어놓아 다리 쭉 펴고 못 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로 잠을 못 드는 사람, 그 사람도 약이나 의사의 도움 없이 제명에 살기 어려울 것이다. 휴식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심은 속도를 낳았고 속도는 휴식이 없는 생활을 낳았다. 휴식이 없는 생활은? 사고를 낳았다. 그래서 제명에 못사는 사람도 많다. 자동차 사고, 공사장 낙반사고, 핵발전소 폭발사고, 환경호르몬 중독사고, 의료사고, 살인, 전쟁이 그렇다. 휴식이 늘 부족한 가운데 허둥지둥 욕심 사나운 사람들은 이제 동물을 넘어 다른 이의 숨을 단축시킨다.

잠을 들지 못해, 아니 잠 잘 틈을 주지 않아 웃자라는 동물도 있다. 컴퓨터로 임신․출산․사육․관리하는 목장의 젖소들이 그렇다. 3년생부터 시작해서 10년까지 우유를 내주던 얼마 전까지의 젖소는 가족의 살붙이 같았지만, 성장호르몬 투약과 엄선된 사료로 2년생부터 우유를 내는 요즘의 젖소는 그야말로 돈이다. 먹는 것에 비해 우유가 철철 나오지 않는 5년생이면 도태 대상이다. 컴퓨터가 비용편익 분기점을 그렇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양계장의 닭도 그렇다.
A4 복사지 박스 크기의 철망 속에 두 마리 이상 갇혀 대낮처럼 불켜진 사육장에서 밤낮 없이 비타민 호르몬 섞인 배합사료와 물을 먹으며 휴식도 없이 알을 낳아야 했던 닭은 효율이 떨어졌다 싶으면 냅다 밖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비틀대는 닭은 햇볕을 비로소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개에게 물려 이내 절명한다. 살코기를 위한 목장의 개와 돼지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가로등 아래 웃자란 벼이삭도 그렇다. 그들은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일찍 죽는다.

전기는 ‘잠 도둑’이다. 양계장의 닭은 전기 때문에 무정란만 실컷 낳다 죽는다. 전기는 휴식도 빼앗아 갔다. 휴식을 잃은 사람은 난폭해지는 법, 1976년 12시간 동안의 뉴욕 정전을 상기해보자. 십계명을 줄줄 외는 청교도 정신의 후예들이 사는 세계 제일의 부자나라 최대 도시 뉴욕에서 벌어진 12시간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 파괴, 난동…. 익명의 암흑천지에서 벌어진 20세기의 아마겟돈, 휴식을 빼앗긴 사람들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대의 사건이었다.

뉴욕 정전의 몇 달 전, 단동에서 있었던 중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은 어떠했을까. 서양식 GNP 잣대로 보아 퍽이나 가난했던 중국의 작은 도시에서 난동은 전혀 없었다. 질서정연한 행동, 마치 자기 가족인 양, 불행을 당한 이웃을 위해 달려가는 희생정신, 건물이 계속 허물어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일본대사는 후일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과 감동에 말없이 숙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동굴 속의 독백》, 이영희, 1999, 나남출판).

질병이 돌면 양계장의 닭은 전멸하지만 자유로움 삶과 휴식이 보장된 마당의 닭은 큰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영혼 헬렌 니어링과 그의 남편 스코트 니어링은 채식만으로 100세 전후까지 살았다. 그들은 땅에서 노동하며 자연에서 천천히 숨쉬며, 마음껏 생각하며, 소신껏 글 쓰며, 자유롭게 살았다. 약도 의사도 그들에겐 거의 필요치 않았다.

약에 의존한 사람의 평균수명이 느는 대신 건강수명은 오히려 줄었다고 한다. 이는 사람만의 사정이 아니다. 사람 주변에만 사는 애완동물도 그렇다. 개의 제왕절개 비용이 사람의 의료수가보다 많다지 않은가. 하지만 휴식 없는 삶이 오래갈 리 없다. 현란한 최첨단이 한 달도 못 가 구닥다리로 변신하듯이, 속도에 지친 인간사는 그 생명이 멀지 않을 것이다.


‘여백의 질서’라 했던가. ‘게으를 권리’와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는 이도 있다.
삶에 여백을 찾자, 페달을 더 빨리 돌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내리막길의 자전거에서 이제 그만 내리자고 하소연한다. 휴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유를 찾은 사람은 너그러워진다. 겨울철 박새를 위해 쇠기름 한 덩어리, 부엌 기웃거리는 너구리를 위해 생선 반 토막을 남겨놓을 줄 안다. 그들을 결코 훼방 놓지 않는다.

하지만 어떨까. 오죽하면 게으르자고, 제발 느리게 살자고 통사정할까. 21세기는 ‘생명공학의 세기’라며 남의 유전자는 물론 자신의 유전자마저 조작, 복제하려하는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다 부질없는 상념일까. 동물의 휴식을 훼방 놓는 이여, 좀 깨닫자. 천천히 6억 번을 숨쉬며 건강하게 사는 것도 죄스러운 것을….(2011. 5.11박병상)

박병상 선생님은
박병상 선생님은
생물학박사. 근본생태주의 입장에서 도시와 생태계 문제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다. 대학에서 ‘환경과 인간’을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생태주의 시각을 지닌 환경활동가를 키우고 싶어 한다.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대표로 활동했고 ‘전태일을 기리는 사이버 노동대학’ 부설 문화교육원 원장과 <인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굴뚝새 한 마리가 GNP에 미치는 영향》(1999, 다인아트), 《파우스트의 선택》(2000, 녹색출판사),《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2008, 책세상),《생태학자 박병상의 우리 동물 이야기》(2002, 복갤럽),《참여로 여는 생태공동체》(2003, 아르케),《녹색의 상상력》(2006, 달팽이),《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2007, 알마)등이 있다. 또한,《녹색평론》과 《환경과 생명》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본문 내용 중 사잔은 인터넷 네이버를 통하여  뉴시스, 블로그 아산적자색양파 등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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