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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토요 시사

진보적 성찰을 할 때가 아닌가

by anarchopists 2020. 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07 06:38]에 발행한 글입니다.


진보적 성찰을 할 때가 아닌가.
-사회진화론을 중심으로-


우주의 만물은 진화하지 않는 게 없다. 이의 주장은 생물진화론에서 계기가 되었다. 생물진화론은 19세기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이 주장한다.(Darwinism) 다윈설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신 중심의 사고방식(창조설)을 뒤집는 ‘진보적 성찰’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이후 이를 사회학적으로 재생산한 이는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Spencer, Herbert;1820~1903)이다. 곧 ‘사회진화론’이다. 사회진화론은 생물진화론처럼 사회도 단순한 상태에서 더욱 복잡한 형태로 진화한다는 주장이다. 즉, 생물체의 기능이 분화되고 통합하는 진화과정을 겪는 것처럼, 사회도 그 기능이 분화하고 통합하는 진화과정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생물진화론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사회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스펜서는 생물세계의 진화과정을 인간세계에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래서 사회진화론은 유럽인들에 의해 자기모순을 갖는 이론으로 둔갑되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을 근대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악용하였다. 그 결과, 사회진화론은 독일의 인종차별주의나 나치즘을 옹호하는 자들의 정치적 이념이 되었다. 제국주의국가들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약탈행위를 정당화하였다. 게다가 영국, 미국 등 자본주의국가의 자본독점에도 악용되었다. 그리하여 경쟁논리와 능력주의가 인간사회의 정의처럼 강조되었다. 이러한 논리는 곧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논리로 발전하여 근대유럽의 세계침략 구실이 되었다. 이처럼 19~20세기 초, 사회진화론의 유행은 ‘약육강식’과 ‘우승열패’(優勝劣敗)같은 야만적 논리를 전 세계인에게 심어주었다.

이 탓으로,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게 된 동아시아에서도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의 양계초 (梁啓超1873-1929)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변법자강의 이론을 수립한다. 곧, “국가의 ‘강력함’(군대와 경찰 같은 억압 기능의 강화)과 ‘우민’(愚民)에 대한 각종 ‘문명화’사업(학교교육 등)을 통한 근대주의”를 주장하였다. 사회진화론적 부국강병론이다. 제국주의적 위협을 막기 위해 제국주의 이념인 사회진화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학문적 성과는 한국에도 영향을 준다. 이 까닭으로, 식민지한국에도 친미적ㆍ친일적 개화론자가 등장한다. 친미적 개화론자들
은 “서구문명수용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자”(기독교적 개화론)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친일적 개화론자들은 근대화를 먼저 이룩한 일본의 성공사례를 배우고 일본의 지도를 받자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근대화시기 및 식민지시기에 사회진화론은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와 1920년대 실력양성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혼을 일깨워준 신채호와 장지연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렇듯 사회진화론은 당시 유럽과 식민지 동아시아 국가의 강력한 사회사조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회진화론은 자기모순을 지닌다. 그래서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은 동아시아인에게 거꾸로 민족적 모순과 봉건적 모순을 일깨워주었다. 곧 동아시아인들에게 진보적 성찰을 하게 만들었다. 양계초의 ‘민족주의ㆍ민주주의ㆍ국민국가’의 건설 주장과 입헌의식의 고취가 그것이다. 그리고 식민지한국의 3.1독립선언의 발생이다. 3.1독립선언서에서는 ‘무력의 시대’(‘침략주의와 강권주의’)가 가고 ‘정의의 시대’(‘인류평등과  세계평화’)가 온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사회진화론은 유럽 제국주의에는 침략과 파괴의 정신을 주었지만 동아시아인에게는 침략주의(패권주의)가 가고 평화주의(공존ㆍ공생주의)가 도래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회진화론의 ‘자기진화’인 셈이다.

이렇게 19세기 사회진화론은 평화와 공존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고 자기존재를 마쳤다. 21세기는 패권주의 시대도, 침략주의 시대도 아니다. 더구나 우열승패, 약육강식의 사조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최근 분단한국사회에 전근대적인 수구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다시 19세기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정책들을 펴고 있다. 그리고 뉴라이트라고 자칭하는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에 토대한 역사발전론을 펴고 있다. 이 결과로, 이명박 정부의 ‘경쟁만능론’(競爭萬能論)이 권력의 통치이념으로 부활하였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낡아빠진 우상’(우승열패론)에 사로 잡혀 역사의 정의(자본의 능력이 아닌, 인품과 인격이 존중되는 사회)를 망각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경쟁주의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성실주의를 무색케 한다.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의 계급사회를 심화시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곧 사회적 약자를 대량으로 발생시킨다. 경쟁주의는 인간을 동물적 야성으로 돌아가게 하는 비열한 논리임을 알아야 한다. 시회진화론은 자기진화를 통하여 공생ㆍ평화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진보적 성찰을 일깨워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교육현장에서 경쟁논리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나. 민족분단 상태를 이용하여 남한경제우월만 강조하고 있어야 하나. 아직도 개인보다 국가를 우위에 두는 국가우월주의에 빠져 있어야 하나. 그래서 국가가 개인과 경쟁하여 민간사찰을 해야 하나. 게다가 국가가 자연과 경쟁하여 자연을 마구 파헤쳐 강을 죽여야 하나, 사회진화론의 자기진화 위에 핀 공생ㆍ평화의 꽃을 우리가 보고 즐길 때가 아닌가, 진보적 성찰을 해본다
.(2010. 8.6 밤, 황보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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