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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서평, 독후감

조봉암평전- 시대의 비극을 노래하다(계속)

by anarchopists 2019. 11.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4/11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조봉암평전- 시대의 비극을 노래하다

(이원규, 조봉암 평전, 한길사, 2013. 3.1)

[어제 이어 계속]그러면 조봉암(가명 박철환)은 누구인가. 그는 강화 시골마을 평범한 농부 집에서 태어났다. 그 후 일제식민지가 되면서 강화에서 3.1만세시위를 벌인 탓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에 간다. 감옥을 나온 후, 일본 유학길을 택한다. 여기서 아나키즘을 알게 되고 다시 사회주의자 김찬(김낙준)을 만나, 사회주의사상과 함께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그는 식민지조국의 해방은 오르지 공산주의 조직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당시 모스코바에서 공산대학을 다니다가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국내로 들어와 조선의 공산주의 대부인 김찬(金燦, 1911~ ?)이 조직한 신사상연구회 조직(1923. 7월 중순, 뒤에 화요회로 고침)에 가입하고 산하의 신흥청년동맹 조직에 앞장을 선다.(1924.2.11.) 이어 이 두 조직을 기초로 국내 《조선공산당》 창당에 일조한다.(1925. 4.17) 이렇듯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조직의 핵심인물로 활동한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만주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부 건설계획을 새우고 그 책임을 조봉암이 맡게 된다. 여기서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계열과 대립한다. 이때 조봉암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조국해방을 앞당기자”(239쪽)는 공산주의 신념을 가지고 민족주의 계열과 충돌을 피해 나갔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을 때 중국대륙에서 국공합작(1차, 1924)에 의한 항일투쟁을 하는 것을 본 조봉암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는 민족유일당운동에 나서게 된다. 여기서 조봉암은 민족주의계열과 연대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코민테른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중국공산당에 흡수시킨다.(1927, 5) 이 때문에 조봉암은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부인 김이옥과 결혼생활은 공산주의자들부터 비난과 외면을 받게 만들었다. 그러한 가운데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감옥생활에 들어간다. 일제는 조봉암의 전향을 끈질기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봉암은 일제의 전향정책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리고 동료들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전향을 하고자 할 때, 그는 이들에게 “생존을 위한 일시적 타협은 변절이 아니다”(322쪽)라는 말로 그들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의 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다.(1939. 7)

해방이 되고 건국(建國)에 대한 주도권 싸움에서 공산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서로 대립하자 조봉암은 “민족주의 진영도 공산주의 진영도 서로 인정하고 어울려야 건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351쪽) 해방 이후 인천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설립하였으나 승전국 미군에 의해 거부되고 친일관리가 다시 인천 부윤으로 선출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조봉암은 “내 조국을 착취가 없는 평등한 나라로 만드는데 힘을 쏟으리라는”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 조봉암은 해방 이후도 여전히 볼세비키였으나 조선공산당은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조봉암을 다시 생각하였다. “내 인생에서 공산주의는 무엇이었던가. 조국독립을 위한 방편이자 수단이었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하여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조국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이다.(358쪽) 이런 생각 끝에 그는 결론을 내린다. “이제 남은 목표는 평등과 평화의 조국 건설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일제에 빌붙어서 민족에게 해악을 끼친 자들이 애국자라고 큰 소리 치며 건국대열에 끼겠다고 나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날의 상황과 똑 같은 상황을 조봉암이 겪고 있었다.

이는 1894년 이미 전봉준도 마음 아프게 느꼈던 상황이다. “한갓 녹봉(급여)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으로 간하는 말을 요언(妖言)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하니 안으로는 보국(報國)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貪虐)하는 관리만 많도다.”(1894.3.20.) 전봉준의 이 말은 우리의 현실과 똑같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말은 요언(긴급조치 위반, 국보법 위반)이요,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은 비도(빨갱이, 종복세력)이다. 조·중·동과 같은 엉터리 언론과 수구세력들만이 보국인재(報國人材)가 되어가는 현실이다.

조봉암이 사고의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결국 미국 CIC(정보부대)의 공작에 말려들어 전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조봉암이 전향을 선택한 이유는 해방조국에 유럽식 사회주의가 최선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조봉암은 청년시절부터 가졌던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게 된다.(387쪽), 이로써 조봉암은 부패된 자본주의가 아닌, 평등, 평균의 사회민주주의사상을 그의 정치신념으로 삼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해방정국의 대한민국은 크게 수구적 민족주의자(이승만을 대표하는)와 개혁적 진보주의자(조봉암을 대표하는) 두 그룹이 형성된다. 두 그룹에서 전자가 친일적 성향을 가진 지주 자본가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면, 후자는 일제 압제 하에서 민족해방운동(독립투쟁)을 하였던 투사들과 농민. 노동자, 서민 등 일반적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은 수구적 민족주의자에 의한 개혁적 진보주의자의 처형이었다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조봉암이 사라진 한국사회는 이제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세력을 이루게 된다. 이들의 정치기조는 민족중흥과 반공주의다. 그리고 이 정치기조를 대대로 울궈먹으면서 파쇼시대를 만들어간다. 그러다가 잠시 개혁세력(결코 진보주의자일 수가 없는)이 정치권력을 잡자, 우리 사회에 진보주의운동이 다시 불을 지피게 된다. 수구적 민족주의자들(이들은 자신들을 보수세력이라고 함)에 의하여 우리 사회에 이상한 진보와 보수라는 두 세력이 대립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진보세력을 용납하는 사회분위기가 아니다. 진정한 사회는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자유롭게 공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많은 세월 수구적 권력에 의해 나라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세뇌되어 우리 사회는 진보주의=빨갱이=종복세력=친북세력으로 왜곡되어 있다. 이렇게 사상과 이념이 왜곡되는 세상은 진전한 보수와 진보세력이 발생할 수도 없고 공존할 수도 없다.

정치 권력자들이 자기 정치이념이나 정책에 반대되고 비판한다고 반대이념을 가진 자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보내면, 이 나라 인재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장차 자기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나라는 누가 만들어갈 것인가. 잘못하면 바보들이 행진하는 우스운 나라가 될 우려가 있다. 정치권력에서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을, 권력유지 목적으로 제정한 권력법(국보법 등)에 의하여 처벌하면, 나라의 장래에 필요한 인재들이 사라지게 된다. 일찍이 민주주의를 만든 나라 그리스에서 있었던 것처럼, “내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은 너의 사상과 이념이 내가 정치를 하는데 위험하고 걸림돌이 되니, 잠시 외국에 나가 있도록 하고 내가 물러난 다음 네가 들어와 네 정치를 해라”는 식의 ‘인재 살려두기’식의 정책과 정치적 행동을 취해야만 이 나라의 장래는 밝아지고 많은 인재들이 나라발전과 공동체 이익을 위해 온힘을 쏟을 수 있다.

죽산이 사형 직전 한 말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48쪽) 그렇지만 정치적 논리에 의하여 감옥에서 억울함 죽음을 당하는 이들이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때다. 본문에서 인용한 이재승의 말처럼, 국가지상주의자들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늘 희생양을 찾는다. 그게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다. 그래서 희생을 당하는 사람의 인격이나 내면의 세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위해 죽여야 한다. 그 명분은 늘 공산주의자, 국가변란음모자, 간첩(빨갱이) 등의 명분이다. 그리고 고문을 가하여 사건을 조작해 낸다. 공산주의가 국가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명목으로 사건을 조작한 것이 박정희 때의 인혁당사건이고 전두환 때 아람회와 오송회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독재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게 국가지상주의자들의 논리라는 말이다. 조봉암이 국가지상주의 독재권력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첫 번째 거물급 인물이 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또 한국정치에 미국이 늘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양 다리를 걸쳐놓습니다. 이쪽저쪽도 다 자기 편인 것처럼 믿게 하죠. 그렇게 저울질 하면서 자기 이해관계를 따지는 겁니다.”(39쪽) 이 사실은 미국의 이익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서 김재규를 이용하여 박정희를 죽인 다음 김재규를 버리고 전두환을 택하는 미국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방정국에서 미국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1) 강대국(미소)의 이념논리에 의하여 영토가 분단되어 각각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체제를 갖는 이념적 분단국가 강제 되었다는 점. 2) 남쪽의 경우 미국의 CIC 공작에 의해 조봉암의 사상이었던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고 민족주의 세력인 이승만의 대항마로 조봉암이 한 축을 이루었으나, 미국의 친일적 민족주의 세력을 분단권력의 중심세력으로 부각시키는 바람에 조봉암은 사법살인을 당해야 했다는 비극적 상황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미국의 공작정치는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독재권력이 지속될 수 있는 정치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정치현실을 개탄하게 만든다.

끝으로, 죽산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1) 미국의 공작에 말려들어 전향을 했다는 점. 2) 이승만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에 일조했다는 점, 3) 4.3제주민중기의를 폭력으로 인식하였다는 점, 4) 지나친 현실주의로 자기합리화를 시켰다는 점은 죽산을 평가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생각이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그러했지만 함석헌식으로 보면, 조봉암은 저자가 그리고 있는 혁신적 진보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를 지녔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조봉암이 죽기 전에 한 말 중 “우리가 못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 사는 날이 올 것이네....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42쪽) 역시 조봉암도 진보당 결성이 때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모양이다. 진보주의자였던 그도 국가지상주의를 버리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을 갖는다. (2013. 4.8, 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 황보윤식)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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