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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자살, 그리고 엉터리 교육시스템

by anarchopists 2019. 12.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4/12 07:08]에 발행한 글입니다.

자살에 대하여
삶을 완성한 자만이 죽을 자격이 있다.

2년 전에는 비교육적 분야 곧, 연예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스타급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의 자살이 잇달아 일어났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 양 언론과 방송에서 대서특필하고 특집보도를 했었다. 이런 일을 볼 때면 미친놈들의 불장난같이 생각된다. 자기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들의 죽음을 요란스레 보도한다면, 이게 후대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적 영향을 미칠까 하는 생각이다. 그저 보도자료에 궁색한 언론과 방송들이 연일 돈에 노예가 된 연예인들 자살보도에 무책임ㆍ무비판적으로 전력투구하는 것을 보면, "돈 버는 데 실패하면 자살하라고" 자살을 부추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학생을 비롯하여 대학원생, 그리고 교수 등 지식인들이 심심치 않게 자살의 문턱을 넘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00에게 미안하다”는 무책임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했다. 도대체 왜 이들이 자살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를 택했는가. 비교육적 분야의 연예인들의 헛된 ‘자살’과 교육적 분야의 대학가 지식인들의 ‘자살시대’ 맞아 ‘생각하는 씨알’들과 함께 죽음(完成)과 자살(未完成)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는 사람이 죽으면, 신분과 계급 그리고 종교적 성향에 따라 ‘죽음’에 대한 표현을 달리한다. 특히 '신분적ㆍ계급적 언어감각'의 발달이 뛰어난 우리말에서는 죽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죽음의 표현도 달라진다. 상전이 죽으면, “승하하셨다”, "돌아가셨어", “타계하셨다”라 하고, 동료가 죽으면 "밥숟가락 났다", "저세상으로 갔다". 뻗었다“라 한다. 죽어서도 계급적 신분이 따라다닌다. 슬픈 세상이다.

또 종교적 감각이 뛰어난 우리말에서도 유교적 감각으로, “운명하셨다”라 하고, 불교적 감각으로는 "극락왕생하셨다", “저승 가셨다”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감각으로는 "천당가셨다", "요단강을 건너가셨다", "주님 곁으로 갔다"로 표현한다. 이외에도, 도교적 감각에서 “숨이 끊어졌다”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옛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한 마디씩 던진다. 자기 상전도 아니고 아래 것도 아닌, 자신과 무관한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툭 던지는 말이 있다. "뒈졌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야말로 참으로 ‘죽음’에 대한 순수한 우리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뒈졌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뒈졌다’는 말의 기본형은 ‘뒈지다’이고. ‘뒈지다’의 표준적 본딧말은 ‘되지다’이다. ‘되지다’를 한문으로 표현하면, ‘완성’(完成)이 된다. 곧 죽음=완성이라는 뜻이 된다. 때문에 인간은 인품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완성이 되어야 ‘죽음’(생의 마감)을 맞이할 자격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말에서 죽음을 ‘뒈지다’로 표현하게 된 근원을 살펴보자. 옛사람들은 가정에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훈육(訓育)할 때 곧잘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인생(삶)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기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고. 우리 옛사람들의 이런 삶의 철학을 성리학의 주기론에 대입하여 되씹어보면 이렇다.

우리 삶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기 '그릇'(삶의 형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그릇은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천 명이면 천 명이 다 자기 그릇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자가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그릇에다 무엇인가 자기 그릇에 맞는 ‘내용물’(삶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가 가지고 나온 그릇에 내용물을 어떻게 담아나가느냐에 따라 각자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더러운 내용물을 채워 넣는 사람은 자기 그릇이 더러워져서 후세에 오명을 남길 것이고, 아름다운 내용물을 채워 넣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아름답게 나타나서 후대 훌륭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그릇에 아름답던, 더럽던 그리고 무용하던, 유용하던 그 내용물이 다 채워지면 삶은 마감된다. '그릇의 소용'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릇의 소용이 다해지는 날이 곧 자기 삶을 완성하는 날이다. 이 시간이 곧, 우리는 각자 ‘죽음’을 맞는 시간이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歸天) 시간이다. 종교인들은 자기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그래서 죽음은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아깝지도 않다. 오히려, 그 사람의 삶의 완성에 대한 축하요, 기쁨이다. 곧 자기 삶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곧 죽음이란 자신이 담은 그릇을 후세 남겨두고 자기존재는 운명을 다하는 일이다. 죽은 사람은 그릇에 무엇을 채워 넣었느냐에 따라, 그릇 값(사람값)을 하게 된다. 살았던 사람의 그릇을 가지고, 아름다운 사람과 더러운 사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게 그것이다. 좋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남긴 그릇을 종교 쪽에서 살펴보면, 공자ㆍ석가모니ㆍ예수 등 성인이다. 학문과 정치 분야에서도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 갈릴레오ㆍ노벨ㆍ아인슈타인ㆍ모택동ㆍ체 게바라ㆍ호치민 등이 그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채호ㆍ장준하ㆍ함석헌ㆍ문익환 등이 있다. 이들이 남긴 아름다움은 지금까지 넘쳐흘러 우리 후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살고 있다.

그렇지만 더러움을 남긴 사람들도 많다. 대체로 더러움을 남긴 사람들은 죽음을 죽음답게 맞이하지 못하였다. 곧 ‘죽음=완성=뒈지다’의 공식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더럽히고 간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유달리 많다. 20세기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대표적이다.

인간사회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교육의 목적은 자신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그릇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함이다. 곧 교육은 '자기그릇을 찾아주는' 행위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 대체로 자기 그릇이 무엇인지를 찾는 교육은 태어나서 고등학교 때까지 이루어진다. 그 이후의 교육은 자기 그릇에 담을 내용물을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연구하고 생각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초중고교시절은 탐험과 여행과 모험과 자유를 만끽하며 자기 그릇을 찾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통제와 강제, 그리고 속박된 교육구조만이 존재한다. 더구나 우월주의ㆍ제일주의ㆍ일등주의 등 경쟁논리를 이념으로 하는 교육시스템만이 작동되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 중심’이 없다. 곧 인문교육의 부재다. 따라서 사람과 자연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 오로지, 일등주의만 존재한다. 그리고 부자 되는 생간(물신숭배주의)만 존재한다.

이런 형편없는 교육시스템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박정희가 중고등학생들의 데모기회를 박탈하기 위한 조치에서 연유한다. 이 때문에 이 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은 불행하게도 타율적인 인간으로 길들여지고 있다. 곧 돈 버는 노예다. 남을 이기는 기계적 인간이다. 이 잘못된 교육시스템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더욱더 강화된 느낌이다. 결국 이런 잘못된 교육시스템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자기가 가지고 나온 사람 중심의 ‘밥그릇’을 제대로 찾을 리 없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교육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인문주의가 죽었다. 인문주의가 배제된 경쟁논리를 이념으로 하는 교육구조는 곧, 우월인간, 일등인간만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멍청한 교육시스템의 작동결과가 지식인의 자살이라는 부도덕한 죽음, 무책임한 죽음, 가치 없는 죽음, 미완성된 죽음, 곧 자살을 난무케 하는 까닭이 되었다.(2008.10.6 초고, 2011.4.12. 아침 다시 씀,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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