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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일요시론] 불안한 씨알,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

by anarchopists 2020. 2.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01 09:10]에 발행한 글입니다.

일요시론-4

불안한 씨알,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

씨알은 불안하다-제2의 용사참사가 언제 일어날지

씨알들은 불안하다. 뉴타운 재개발의 사슬에 묶여 졸지에 도시 빈민이 될까봐 불안하다.
어엿한 자영업자 사장님(?)이 알거지가 된 뒤 옥탑에 세운 농성장에서 날을 지새우는 싸움꾼이 될지 몰라 불안하다. 뉴타운 재개발이라는 ‘토목국가의 돈놀이 잔치’에 초대받은 세입자 앞으로 철거통지서가 날아올지 몰라 불안하다. 언제 용역깡패가 들이닥쳐 알뜰살뜰 꾸며온 가게를 박살낼지 몰라 불안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세입자의 농성장 부근은, 용산 참사와 같은 ‘죽임의 난장판’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지대(불안한 지대)’이다. 이 불안지대를 에워싼 국가권력(공권력)의 폭력이 살인극을 유발했다.


서울 시내 곳곳의 뉴타운 재개발 사업장은 국가권력의 폭력과 (이에 저항하는 씨알들의) 몸싸움이 직접 대결하는 ‘주거권 전쟁터’이다. 주거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민사회의 화약고이다. 대결의 상황에 따라 ‘제2의 용산참사’가 터질 개연성이 있다고 한다.

주거권을 에워싼 시민전쟁(Civil War)이 서울시 전역에서 진행 중이다. 세입자의 주거권 인정(認定)을 둘러싼 전쟁터는, 시민 누구나 ‘사람 죽이는 공권력의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불안감을 제공한다.

뉴타운 개발과 관련하여 사람 잡는 공권력이 불안의 원흉이다. 물론 사람 잡는 공권력의 배후에 토목국가가 버티고 있으며 토목국가는 재개발 관련 신자유주의 자본(신자유주의에 따라 축적하는 자본)과 유착하고 있다. 따라서 ‘토목국가+토목자본의 복합체’가 불안의 원흉이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이 토목자본은, 신자유주의형(型) 개발 노선을 펼치는 이 명박 정권의 토목국가 사업에 투자하는 대형 건설회사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어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주술에 놀아나는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발독재’의 산물이 용산 참사이며, 이 참사의 사망자가 아직도 저승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시민 누구나 이러한 참사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며, ‘토목국가+토목자본의 복합체’가 시민사회를 위협하며 희생자가 되라고 유혹하고 있는데 있다.

사람살리는 정권이 아니라 사람 죽이는 권력

사람 살리는 권력(活人權力)이 아닌 ‘토목국가+토목자본 복합체’의 사람 죽이는 권력(殺人 權力)이 시민사회의 주변을 배회하는 이 시대의 가장 큰 화두는 ‘불안’이다. 그래서 ‘토목국가+토목자본 복합체’의 올가미에 걸린 씨알들의 삶이 원초적으로 불안하다. 불안한 씨알들의 대다수가 무산자(無産者; 프롤레타리아트)에 가까우므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말할 수 있다. 무산자가 아닌 자영업자도 뉴타운 재개발의 덫에 걸리면 무산자가 되므로, 세입자 전체가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처럼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불안한 씨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더욱이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서 사는 불안한 씨알들 중 상당수가 ‘고용불안을 안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므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불안한 씨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논리의 타당성이 입증된다.

여기에서 ‘불안한 씨알’의 이웃사촌인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는 필자가 처음 개발한 조어가 아니다. 이미 유럽에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에 해당되는 ‘precarious proletariat’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으며 ‘precarious proletariat’를 중심으로 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precariat’는 불안정하다는 뜻의 ‘precarious’와 무산자를 뜻하는 ‘proletariat’가 합성된 조어이다. 후기 포디즘(Post Fordism)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의 시장중심 원리에 의해 불안한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precariat’이다.

신자유주의가 횡행하는 21세기의 벽두에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를 ‘precariat’라고 총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아래의 불안한 삶을 떨치고 안전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겠다는 투쟁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2004년 10월에 신자유주의형 통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유럽의 precariat에 의한 미들섹스 선언(Middlesex Declaration of Europe’s Precariat)’이 채택되었다. 이어 이 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운동이 유럽의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어서 한국의 운동진영도 이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이탈리아 등에서 precariat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므로, precariat 운동의 한국화(化)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precariat 운동과 관련된 홈페이지 주소; http://republicart.net).



요약해서 말하면, 서울시 등 대도시의 신자유주의형 뉴타운 재개발은 시민사회의 공동체, 시민사회의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이 주범은 ‘토목국가+토목자본 복합체’와 더불어 precariat를 양산하고 있다. 이미 신자유주의 자본에 의해 일차적으로 precariat가 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웃사촌이 뉴타운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들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씨알들도 precariat가 될 수 있는 불안한 시대의 ‘불안한 씨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precariat 운동을 펼쳐야하지 않을까?(김승국)


김승국(金承國) 평화운동가는
■ 숭실대에서 철학박사학위을 취득(1995)한 후,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낸 바 있다. 사회경력으로는 “한겨레신문” 기자와 월간 “말”지 편집국장을 거쳐 지금은 인터넷신문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발행인으로 있다. 이외 영세중립통일협의회 이사로 활동하는 등 평화활동가이다. 지금은 한일 100년 평화시민네트워크 운영위원, 평화헌법시민연대(한국 9조의 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핵문제‧ 핵인식론》(1991), 3. 오만한 나라 미국》( 2002),《한반도의 평화와 북한 핵문제》(2007)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맑스‧ 엥겔스의 종교론》(마르크스‧ 엥겔스 지음, 1988)가 있다. 그 외 <한반도의 평화 로드맵>(2005) 등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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