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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일요시론-7] 개발성장이 아니라 복지성장이다.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15 07:55]에 발행한 글입니다.


복지를 통한 성장이어야 한다

부자편 정권 - 이 나라 앞길이 캄캄하다.
우리가 이상적 체제라고 믿고, 또 스스로 그러한 체제하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자유민주주의란,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두 바퀴로 삼아 굴러가는 수레이다. 그런데 이 수레가 삐꺽거리고 있다.
아니 찌부러져 주저앉아버린 형국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영향력이 너무 커져버리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레가 더 이상 굴러갈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인 로버트 라이시는 이를 슈퍼자본주의라 명명했다. 미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갖는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1원이 1표를 행사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많은 사람의 발언권이 센 것은 필연적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더라도 수십억 부자는 값싼 이자를 지불하지만 서민층은 이자율이 심지어 수십 퍼센트에 이르는 고리자금을 쓸 수밖에 없으니 그 격차는 점점 커지게 되어 있다. 눈사람을 만들 때 눈덩이가 커져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와 같은 격차를 1인이 1표를 행사하는 민주주의로서 보완해 주어야 자유민주주의는 순조롭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정부가 이런 자유민주적 기본원리를 잘 이해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앞장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앞길이 막막해 보인다. 용산참사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땅값은 1년사이에 무려 10배 이상 뛰어서 지주들은 지가폭등으로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었는데, 지주들에게 세 들어 영세한 사업을 벌인 세입자들은 원금도 회수하지 못한 채로 쫓겨나는 현실 때문에 이와 같은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선 공권력은 자본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만 보호해주고 약자의 생존권은 보호해주지 못한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정부가 오히려 신속한 개발을 통한 이익신장에 골몰하는 건설업자의 편에 서서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이러한 상황을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하면서 747(7% 성장, 국민소득 4만불 , 7대 경제강국)이라는 장밋빛 공약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이처럼 오로지 경제 성장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으나 집권 초부터 내외적 여건의 악화로 이미 공약(公約)은 헛된 약속(空約)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애당초 달성하지도 못할 공약을 내세웠는데 세계적 금융위기가 닥쳐 우리만의 문제도 세계자본주의의 문제로 ‘물타기’를 해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할 위인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현 정부는 과거 정부에서 경제가 죽었으므로 살리겠다고 했는데 사실 지표상으로는 별로 나빠진 것은 없다. OECD 선진국들의 평균 성장률을 보면 지난 30년 동안 5% 성장을 넘은 적이 없다. 우리가 저개발국이었을 때는 7~8% 이상 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했지만 잠재성장율이 4~5% 정도인 현재 그 이상의 성장을 내세운 것은 국가운영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물론 과거 정부가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좌측 깜빡이 키고 우회전했다는 평가가 있고, 국내적 조정장치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FTA를 밀어부친 것 등 오류도 많았다. 또한 카드남발이나 무분별한 공약으로 부동산 거품을 조성하여 일시적으로 경기부양효과를 보았겠지만 동족방뇨(凍足放尿)일 따름이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선복지ㆍ후성장이어야 한다.
이러한 근시안적 정책을 펼쳐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성장기반을 조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지난 10년의 경제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정권이 그 실패의 반사이익을 업고 집권에 성공했으면 같은 실패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더욱 암울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걱정이다.

정치도 경제도 70년대식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OECD 고소득국가들이란 1~2년 반짝 성장하고 만 것이 아니라 성장과 복지의 조화 속에서 30년 이상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나라들이다. 이들의 발전과정에서 배워야 할 것이란 성장과 복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함께 굴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분배할 시기가 아니니 기다려야 한다는 70년대 사고방식으로 토건사업을 벌이고, 외환을 관리하고, 국민을 통제함으로써 21세기에 지속성장을 하겠다는 것은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위기가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듯이 위기 시에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 성장과 복지의 균형을 잡아야할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복지는 정부의 의지이다. 정부가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자원을 투입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현 정부의 ‘능동적 복지’ 정책 속에서는 복지관련 예산은 가장 후순위로 밀려나 있다. 경제위기가 닥치니까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복지를 언급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 정부가 강조하는 능동적 복지의 본질은 정부의 능동성이 아니라 개인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국민 스스로가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복지의 수혜층은 스스로 알아서 할 힘이 없는 계층이다. 고령화, 사회적 양극화의 진전으로 복지예산의 증가가 더욱 필요한 시점에서, 예산의 억제와 복지사회의 미래비전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 또한 자가당착이다.

북구 및 서유럽 국가들은 별도로 하더라도, OECD 국가 중 상대적으로 복지후진국인 이탈리아, 일본, 미국, 멕시코에 비해서도 우리나라의 복지부분 지출은 터무니없이 적다.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비중(2001년 기준)은 이탈리아 24.4%, 일본 16.9%, 미국 14.8%, 멕시코 11.8%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6.1%에 불과하다. 복지의 확충을 통해 내수기반도 키우고 성장잠재력도 키워야 한다.

복지 지출은 저소득층에 대한 퍼주기가 아니라 장기적 성장잠재력 강화라는 투자의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선진국들은 그들이 의식했건 못했건 복지국가와 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것이다. 우선 성장한 다음에 복지를 베푼 것이 아니라 비전을 미리 준비해서 그쪽으로 달려온 것이다. 미국은 대공황 때, 유럽은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준비한 것이다. 선성장, 후복지를 통해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

시장절대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은 아직도 복지기능이 약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 2명이 장기경제성장 기틀을 마련했다.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공화당 소속이고 집안대대로 부자인 집안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강하게 부자들을 압박하여 경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대공황의 그늘이 어두웠던 1933~1945년에 재직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만들었고 부자들 세금을 크게 올리기 시작했다.

법인세를 1929년 14%에서 1955년 45%까지 올렸다. 상속세도 20%에서 77%까지 올랐다. 미국 경제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대공황을 틈탄 빈부격차의 감소(The Great Compression)가 중산층을 두텁게 만들었고, 와그너 법 제정으로 노동권을 강화하여 그 뒤 40~50년 동안 미국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금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만은 미국사회의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해 부자를 위한 세금감면 폐지, 누진세 강화, 탈세 차단, 최저임금제의 강화와 더불어 전국민 건강보험의 도입을 주장한다.

오바마도 대체로 이와같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부양과 감세정책 등 일본에서 잃어버린 10년 동안 실시했던 실패한 정책을 붙들고 있는 정부가 걱정된다. 아니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우리 서민이 걱정이 되서 하는 소리다. (글; 전종훈)


전종훈 선생님은
경제학 박사로 현재 극동대 겸임교수로 있습니다.
사진과 이력사항을 올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운영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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