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신앙과 종교적 광신의 서술 애매 모호성

by anarchopists 2019. 11.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5/3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신앙과 종교적 광신의 서술 애매 모호성



  종교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이 믿는 바 그것이 신앙이냐 아니면 광신 혹은 맹신이냐 하는 것이다. 이 둘의 판단은 맥락에 따라서 해석이나 서술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가 있다. 믿음의 행위가 표현될 당시에는 분명히 광신이라는 인식과 언표가 가능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광신이 아닌 진정한 신앙의 표상으로 재해석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자면 한국가톨릭 초기의 역사에서 조상의 위패를 우상이라고 불태움으로써 죽은 사건은 당대의 정황으로는 ‘광신’임에 틀림이 없으나, 나중에 그들의 행위는 ‘순교’로 일컬어짐으로써 순수 신앙 사건의 범주로 본다). 다시 말해서 “그때 그 부정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내용들을 근원적으로 종교적인 삶의 양태 곧 ‘신앙’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도 그 둘을 구분하려는 분명한 판단이 문화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신’이라고 하는 서술 범주가 그렇다.”(정진홍, 하늘과 순수와 상상, 강, 1997, 263-266쪽) 여기에서 우리는 “‘광신’을 신앙에서 이성적인 것이 결여된 잘못된 신앙 곧 맹목적인 신앙을 지칭하면서 이를 ‘신앙 아닌 것’으로 여기려 한다.”(정진홍, 하늘과 순수와 상상, 강, 1997, 263쪽)


문제는 이러한 광신이라는 종교적 현상이 종교의 역사에서 혹은 종교의 현존과 더불어 담론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한 신앙의 이성적 측면에 반하는 반이성적인 현상에 대해서 매우 꺼려했던 것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광신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두려움은 바로 그것이 갖고 있는 “반사회적인 현상이거나 규범 일탈적인 현상이거나 반윤리적 현상이거나 기만적이고 파렴치한 현상”(정진홍, 하늘과 순수와 상상, 강, 1997, 265쪽)이 나타나는 데서 발생한다. 따라서 종교 현상으로서의 광신은 건강한 신앙의 현존과 나란히 놓고 논해야 하는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순수한 신앙, 정통적인 신앙이라 할지라도 신앙 안에는 광신이라는 것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종교 밖의 음모나 종교 현상 밖의 경험이 아니라 종교 경험의 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즉 “광신은 종교 경험에 우연한 것으로 첨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삶의 일탈이 빚는 다른 것일 수도 없다. 광신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종교 자체의 모습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삶이 지닌 이상스러움, 그 다름, 그 비일상성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상황적으로 인지될 뿐인 그러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딜레마이다.”(정진홍, 하늘과 순수와 상상, 강, 1997, 267-268쪽)


  그렇다면 신앙과 광신은 어디서 갈리는가. 그것은 바로 “종교의 윤리”이다. 종교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와 행위가 신앙이냐 아니면 광신이냐를 가르게 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종교 공동체 스스로 발언하는 내용과 그에 걸맞은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행위가 종교 안팎에서 용인될 수 있는 인식의 범주, 상식의 범주가 된다면 광신은 신앙의 범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 광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회 여러 현상들 중에 하나인 종교 현상으로 나타난 인간 광기의 측면에서의 광신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달라진다.(정진홍, 하늘과 순수와 상상, 강, 1997, 269-270쪽) 사회는 그 두려움과 낯선 현상으로 인해서 종교에 대한 접근성을 용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광기에 대한 표출이 숭고함을 넘어서 전혀 낯선 이질적인 삶의 모습으로 경험이 강요되는 듯한 종교 현상이 되어 버린다면 인간은 그것을 건전한 이성의 범주에서 판단할 수 있는 신앙이 아닌 광신으로만 판단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종교의 윤리는 종교의 사회적 봉헌일 것이다. 그럴 경우 종교적 제의나 언어가 얼마나 사회적 상황과 적합하며 합리적일 수 있는가, 즉 종교의 언어나 행위는 열린 언어와 행위이어야 한다. 굳이 특정한 사물과 특정한 행위에 대해서 언어나 행위에 특수한 명명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제의나 광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종교적 제의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닫힌 제의가 아닌 열린 제의여야 한다. 더불어 닫힌 언어가 아니라 열린 언어이어야 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해 가능한 언어나 행위로 인식될 수 없는 종교적 제의, 종교적 행위는 한낱 열광하는 공동체의 몸짓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정진홍, 하늘과 순수와 상상, 강, 1997, 269-270쪽)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