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법원은 인권의 최후보루다

by anarchopists 2020. 1.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11/11 20:34]에 발행한 글입니다.


법원은 인권의 최후보루다.
-법이 약자의 인권을 모르쇠 한다면, 민주주의는 없다-


민주주의는 자유=인권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이 자유가 유린된다면 이미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에서도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라고 했다. 그만큼 민주주의에서 핵심내용은 인권=자유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법치주의에 의해 민주주의의 사회질서가 유지된다. 이 법치에 의하여 대통령 선거도 이루어지고 이명박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법치주의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어놓고 법치에 반하는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이미 대통령이 아니다. 그리고 법원이 국가의 잘못에 대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못한다면 이 나라에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이명박 권력의 출범과 함께, 이 나라의 사법부는 노예적 굴종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언론미디어법 유효판결(2009. 7. 22 국회통과, 헌법재판소 2009. 10.29 유효판결)과 용산참사 유죄판결(2009.1.20 발생, 2009. 10.28 유죄 판결)이 그것이다. 앞의 것은, 재판부에서 "절차상 위법은 인정되지만 법안 가결은 무효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뒤의 것은 “누가 화염병을 던진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이라는 경찰수사의 ‘절차상 잘못’을 인정하면서 유죄판결을 내렸다. 헌재의 판결내용은 곧, 도적놈이 남의 집에 들어가 도적질을 한 것은 잘못이나, 주인한테 들키지 않고 도적질을 했다면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인간의 기본적 윤리를 파괴하는 판결이다.

또 용산참사에 대한 유죄판결은 개가 웃을 판결이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누군가 이명박 대통령을 죽이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경찰이 꿈 꾼 사람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검찰은 꿈 꾼 사람을 대통령 시해음모죄로 기소하였다.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대로 꿈을 꾼 사람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통령을 죽이려 생각지도 않은, 단지 꿈을 꾼 사람을 대통령 시해음모자로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는 건지. 마찬가지로,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놓고 사회적 약자만을 처벌할 수 있는 건지.


민주주의 행위의 핵심은 ‘절차의 적법성’이다. 따라서 절차상 위법(불법행위)에 의해 발생한 모든 결과는 적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그런데 위 두 가지 사건은 판결문에서 밝혔듯이 절차에 중요한 잘못(하자瑕疵)을 남겼다. 그렇다면 미디어법의 국회통과와 용산참사의 유죄판결은 원천무효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국가(입법과 행정)가 절차를 무시하고 인민에게 권력의 강제를 가했다면, 사법부는 권력의 강제를 당한 약자 편에 서서 적극적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한 예를 들어 보자.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 두 권력이 국가폭력(=불법행위=절차의 잘못)을 가하여 조작한 용공사건이 있었다. 앞의 시대에는 인혁당사건(1964. 8)이었고, 뒤의 시대에는 아람회사건(1981. 8)이었다. 당시는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던 시대이다. 그래서 두 사건은 모두 유죄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이 두 사건은 재심을 청구하였다. 그리고 각각 무죄가 선고 (2007. 1.23과 2009. 5.21)되었다. 곧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한 법에서 사법부는 국가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절차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였다. 즉, 법원이 적극적 의무를 다한 결과이다. 아람회사건 재심판결(재판장 이성호) 내용은 법원의 적극적 역할에 대하여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람회 사건에 대하여 재심재판부는 “영장 없이 보안분실에 가둬놓고 일주일 이상 잠재우지 않기, 물고문, 집단구타 등의 가혹행위로 거짓 진술을 받아낸 불법행위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국가의 ‘절차상 잘못’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구금과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했다고 절규했음에도 당시 법관들은 이를 외면한 채 진실을 지켜내지 못했다"고 판결함으로써 재판의 절차상 하자도 고백하였다. 또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법관에게는 소수자 보호라는 핵심 과제가 있어 절대 권력자가 진실에 반하는 요구를 해도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 "비록 (법관이 국가에 의하여) 극심한 불이익을 받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재판부가 국가의 잘못에 대하여 약자를 위해 ‘적극적 의무’를 다해야 할 책무가 있음도 밝혔다. 이렇듯 사법적 정의는 법이 약자의 손을 들어주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삼권분립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과 법의 역할이 다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못된 권력자들에 의해 자주 인민의 자유(=인권)가 억압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 법원은 국가의 행동에 대하여 인권의 가치와 원칙에 기반을 두고 적극적인 ‘책무성ㆍ평등성ㆍ심의민주주의’의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법원은 자유=인권과 민주주의의 최후보루이다. 그런데 법원이 오히려 국가권력에 저자세로 굴종한다면 민주주의는 실종된다. 그리고 이 나라 약자는 갈 곳을 잃는다. 민주주의의 질서유지 수단인 법치는 그 존재가치를 잃는다. 법치가 사라지면,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 내려준 고귀한 생존가치인 인간의 자유, 곧 인권이 억압되고 행복한 삶은 상실된다. (취래원 농부, 2009. 11.7 초안, 11.8 수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