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3/06 07:2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영호 교수의 일요시론]
그런데, 중동은 중동이고 이 사회에서도 구시대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세계 최대교회임을 자랑하는 어떤 교회의 원로목사가 한 마디 한 것이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경제문제에 관련된 것이어서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발언이다. 결국 그 발언의 효력이 나타나서 중동자금 도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 목사는 변명, 사과하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중동자금이 도입되면 유리한 재벌에게 불리하게 된 것은 장기적으로 국민경제를 위해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 목사는 다른 보수교단들과 더불어 지난 대선 때 현 정권 창출을 위해서 크게 공헌했다고 하면서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고 대통령하야를 위해서 투쟁하겠다고 한 선언이다. 종교가 정치에 깊이 관여해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증언이다. 현 정권이 ‘고(려대)ㆍ소(망교회)ㆍ영(남)’ 정권이라는 것은 단순한 소문이나 추측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은 집권 3년이 지난 지금 통계상으로도 명백해졌다. 소망교회를 취재하는 MBC (추적 60분) 피디를 타 부서로 전보시킨 일이 연달아 일어난 최근의 일이 그 한 증거다.
목사의 주장은 학연과 지연에다가 종교까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연줄 네트워크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여기에다가 혈맥과 재벌 맥을 더하면 한국사회 지배구조의 그림이 완성된다. 자유로운 시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이 요인들이 선거 때마다 상호작용하면서 정치질서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혁명에 해당한다. (지난 두 정권은 적어도 출발은 혁명적이었다.) 98년 대선 때 지금의 여당후보는 영남불교인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이미 서울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발언을 했었던 터다. (그 신은 불행히도 세계 신, 우주 신이 아니고 수입된 중동 신, 서양 신이었다.) 그럼에도 반도 동남권 불교인들은 이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지역감정이 종교신앙을 우선했다.
후보로서 숫자계산을 하면 승산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과 특정 종교를 합치면 나머지는 무시해도 된다. 그것이 박정희에게서 물려받은 해법이다. 그는 지역감정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향수가 다음 대선에도 작용할 것은 뻔하다. (박정희 귀신 물러가라!) 이 땅의 민주주의가 모든 인위적 경계를 벗어나서 민중(씨알)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실상부하지 못한 현실은 ‘민주공화국’이 북쪽의 ‘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오십보백보임을 말한다. (그 점에서 비슷하니까 통일이 빨리 이루어질 법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기득권 보수 싸움이나 쟁탈전이기 때문이다.)
경제와 종교는 영역과 기능, 차원이 다르다. 경제 논리로 종교를 다룰 수 없고 그 반대도 그렇다. 종교와 과학, 종교와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이전 시대에는 종교를 지배윤리로 삼아서 통치했다. 신정일치는 아니지만 종교와 정치의 유착이었다. 예를 들면, 신라시대, 이조시대에는 ‘호국불교’를 내세워 국가에 충성을 강요했다. 호국이 아니고 사실은 왕권을 비호하는 ‘호왕권불교’였다. 이승만 시대에는 ‘호정권불교’였다. 지금 현 정권에서는 기독교가 호국불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다만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관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경제나 정치가 종교적 진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문화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함석헌은 늘 정치를 종교적 가치관의 시각에서 평가하고 비판한다. (그에게 종교는 종파의 교리나 조직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인간의 도덕과 사회윤리의 근원이 된다. 기독교는 서양윤리의 뿌리가 되었고 유교, 불교, 힌두교는 동양윤리의 원천이었다. 중동 아랍권은 아직도 이슬람 윤리에 얽매어 산다.
문화권마다 민족마다 고유한 종교전통이 있다. 우리민족도 지내오다가 중국에서 또는 거쳐서 도입된 외래종교에 눌려서 오래 동안 표출되지 못했다. 그 틀 거리만 무교(shamanism) 안에 일부 잔재되어있다. 그 원형은 우리 유전인자 속에 잠재되어있는 셈이다. 독특하게 보이는 함석헌의 종교관도 그 표출이라고 봐야한다. 근대에 와서 그 원형은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외래종교도 다소간 고유전통과 융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 목사가 속한 교회도 무교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미국 신학자(하비 칵스)도 한 바 있다. 토착화하지 못한 외래종교는 오히려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봐야한다. 종교는 현지문화와 융화해야 할뿐더러 시대에도 적응, 조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슬람 자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점은 8세기 교리를 새롭게 해석, 표현하면서 시대에 발맞추지 못한 데 있다. 초기 이슬람교의 정당성은 같은 뿌리인 유대교와 기독교가 못 이룬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운 계시로 받았다고 하는 주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은 시대에 따라 다른 화신(avatar)이나 메신저를 보낸다는 사실과 부합하는 주장으로 들린다. 하지만 8세기에 창시자 모하멧이 받은 계시가 마지막이란 고집은 자기모순을 지닌다.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 간, 국가 간 갈등의 뿌리가 되는 종교간 갈등은 상호 모순적이다. 그렇다고 이슬람 이후 현대에 이르는 새 종교나 종파들이 새로운 계시를 대표한다는 주장을 다 인정할 수도 없다. 새 종교는 시대마다 자기 역할을 끝내고 사라져야 하는데 결국 자기 절대화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조직종교는 모순을 내포한다. 이슬람만 단 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직종교는 다 비슷하다. 남의 종교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함석헌의 종교관을 들어보자.
“남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은 우리 초가삼간보다 작은 집이다. 내 종교가 큰 종교지 내 거 되지 못한 종교, 한 사람도 건지지 못하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허울이 무슨 위대한 종교일 수 있을까? 제 종교만이 큰 종교다. 제 종교를 가진 한 사람만 있어도 온 세상이 다 구원될 것이다. 한 사람이 물에서 나오면 모든 사람이 다 살게 된다.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건진다고 큰 말을 하는 종교는 한 사람도 못 건질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종교도 아니기 때문이다. 큰 것은 하나님이요 큰 것은 곧 나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나의 종교가 종교다. 교도(敎徒)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 교도 많을수록 가짜 종교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해라... ‘중보’ 소리 많이 하는 종교, 협잡종교다... 중보란 종교심을 이용해먹는 민중 착취기관이다. 중간에서 받아 돌리는 소리는 모두 거짓말이다... 우리나라에 위대한 문학 없는 것은 민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그것을 아직 하지 못했다.”(함석헌저작집 6권 89-90쪽)
제도종교의 한계를 명백히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 전형적인 한계를 노출하면서 신도를 배타적인 교리의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있는 대형 교회의 우두머리가 자기 잣대로 다른 종교를 비판하고 비하하면서 이슬람의 전파를 우려해서 이슬람 채권법 적용을 반대하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할 뿐 아니라 종교다원주의가 상식인 세계화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배타주의적 행태이다. 이슬람 국가의 신정일치나 현 정권의 정교유착은 크게 다른 것이 아닐진대 이슬람의 전교를 막을 자격이 있는가. 그러면서 중동국가에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무슨 짓인가. 최근에도 리비아에서 그 문제가 크게 터져 경제교류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
또한 장로 출신 대통령이 개인 신앙과 국정을 혼동하면서 목사에게 굴복하는 것은 국민의 위임권을 남용한 위법행동이요 배신행위이다. 게다가 조찬기도회에서 목사 앞에 무릎을 꾼 희한한 장면을 연출했다. 종교편향은 지도자의 임무인 국민통합을 역행하는 행위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그가 자주 외치던 ‘공정한 사회’는 어디로 갔는가. (2011.3.6., 김영호)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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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교수의 일요시론]
정치는 종교의 시녀인가
- 정교유착과 이슬람 채권법-
현 정권처럼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혼란스럽게 만든 정권이 해방후 역사에 또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정치도 타락시키고 종교도 타락시켰다. 동반타락이다. 종교와 정치는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상호 보완해야하지만 각기 영역과 역할이 다르다. 근대까지는 종교가 늘 정치를 지탱하기도 하고 간섭하기도 해왔지만 민주주의시대에 이르러서 그 역할은 끝났다. 지금 중동 이슬람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혁명은 구시대를 지배하던 신정일치 체제의 때늦은 마지막 정리작업이다.
- 정교유착과 이슬람 채권법-
중요한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 목사는 다른 보수교단들과 더불어 지난 대선 때 현 정권 창출을 위해서 크게 공헌했다고 하면서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고 대통령하야를 위해서 투쟁하겠다고 한 선언이다. 종교가 정치에 깊이 관여해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증언이다. 현 정권이 ‘고(려대)ㆍ소(망교회)ㆍ영(남)’ 정권이라는 것은 단순한 소문이나 추측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은 집권 3년이 지난 지금 통계상으로도 명백해졌다. 소망교회를 취재하는 MBC (추적 60분) 피디를 타 부서로 전보시킨 일이 연달아 일어난 최근의 일이 그 한 증거다.
목사의 주장은 학연과 지연에다가 종교까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연줄 네트워크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여기에다가 혈맥과 재벌 맥을 더하면 한국사회 지배구조의 그림이 완성된다. 자유로운 시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이 요인들이 선거 때마다 상호작용하면서 정치질서를 만들어낸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혁명에 해당한다. (지난 두 정권은 적어도 출발은 혁명적이었다.) 98년 대선 때 지금의 여당후보는 영남불교인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이미 서울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발언을 했었던 터다. (그 신은 불행히도 세계 신, 우주 신이 아니고 수입된 중동 신, 서양 신이었다.) 그럼에도 반도 동남권 불교인들은 이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지역감정이 종교신앙을 우선했다.
후보로서 숫자계산을 하면 승산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과 특정 종교를 합치면 나머지는 무시해도 된다. 그것이 박정희에게서 물려받은 해법이다. 그는 지역감정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향수가 다음 대선에도 작용할 것은 뻔하다. (박정희 귀신 물러가라!) 이 땅의 민주주의가 모든 인위적 경계를 벗어나서 민중(씨알)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실상부하지 못한 현실은 ‘민주공화국’이 북쪽의 ‘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오십보백보임을 말한다. (그 점에서 비슷하니까 통일이 빨리 이루어질 법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기득권 보수 싸움이나 쟁탈전이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관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경제나 정치가 종교적 진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문화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함석헌은 늘 정치를 종교적 가치관의 시각에서 평가하고 비판한다. (그에게 종교는 종파의 교리나 조직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인간의 도덕과 사회윤리의 근원이 된다. 기독교는 서양윤리의 뿌리가 되었고 유교, 불교, 힌두교는 동양윤리의 원천이었다. 중동 아랍권은 아직도 이슬람 윤리에 얽매어 산다.
문화권마다 민족마다 고유한 종교전통이 있다. 우리민족도 지내오다가 중국에서 또는 거쳐서 도입된 외래종교에 눌려서 오래 동안 표출되지 못했다. 그 틀 거리만 무교(shamanism) 안에 일부 잔재되어있다. 그 원형은 우리 유전인자 속에 잠재되어있는 셈이다. 독특하게 보이는 함석헌의 종교관도 그 표출이라고 봐야한다. 근대에 와서 그 원형은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외래종교도 다소간 고유전통과 융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 목사가 속한 교회도 무교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미국 신학자(하비 칵스)도 한 바 있다. 토착화하지 못한 외래종교는 오히려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봐야한다. 종교는 현지문화와 융화해야 할뿐더러 시대에도 적응, 조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슬람 자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점은 8세기 교리를 새롭게 해석, 표현하면서 시대에 발맞추지 못한 데 있다. 초기 이슬람교의 정당성은 같은 뿌리인 유대교와 기독교가 못 이룬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운 계시로 받았다고 하는 주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은 시대에 따라 다른 화신(avatar)이나 메신저를 보낸다는 사실과 부합하는 주장으로 들린다. 하지만 8세기에 창시자 모하멧이 받은 계시가 마지막이란 고집은 자기모순을 지닌다.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 간, 국가 간 갈등의 뿌리가 되는 종교간 갈등은 상호 모순적이다. 그렇다고 이슬람 이후 현대에 이르는 새 종교나 종파들이 새로운 계시를 대표한다는 주장을 다 인정할 수도 없다. 새 종교는 시대마다 자기 역할을 끝내고 사라져야 하는데 결국 자기 절대화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조직종교는 모순을 내포한다. 이슬람만 단 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직종교는 다 비슷하다. 남의 종교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함석헌의 종교관을 들어보자.
제도종교의 한계를 명백히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 전형적인 한계를 노출하면서 신도를 배타적인 교리의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있는 대형 교회의 우두머리가 자기 잣대로 다른 종교를 비판하고 비하하면서 이슬람의 전파를 우려해서 이슬람 채권법 적용을 반대하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할 뿐 아니라 종교다원주의가 상식인 세계화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배타주의적 행태이다. 이슬람 국가의 신정일치나 현 정권의 정교유착은 크게 다른 것이 아닐진대 이슬람의 전교를 막을 자격이 있는가. 그러면서 중동국가에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무슨 짓인가. 최근에도 리비아에서 그 문제가 크게 터져 경제교류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
또한 장로 출신 대통령이 개인 신앙과 국정을 혼동하면서 목사에게 굴복하는 것은 국민의 위임권을 남용한 위법행동이요 배신행위이다. 게다가 조찬기도회에서 목사 앞에 무릎을 꾼 희한한 장면을 연출했다. 종교편향은 지도자의 임무인 국민통합을 역행하는 행위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그가 자주 외치던 ‘공정한 사회’는 어디로 갔는가. (2011.3.6.,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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