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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도덕경 강의

도덕경이 쓰인 시기와 그 진위

by anarchopists 2019. 11. 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3/15 06:57]에 발행한 글입니다.


《道德經》(도덕경)이 쓰인 시기와 그 진위(眞僞)

도덕경이 쓰여 진 때와 그 진위에 대하여서는 이야기가 분분하다. 양계초는 도덕경이 쓰여 진 시기는 전국시대 말기라고 한다. 도덕경과 《論語》(논어), 도덕경과 《莊子》(장자) 중 어느 것이 먼저 저술되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장자에 보면, 노자와 도덕경과 관계있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외에도 진 나라가 중국천하를 통일하기 이전의 기록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곧, 도덕경이 장자보다 먼저 성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계초 등 많은 학자들은 도덕경이 전국시대 말기에 성립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한 근거는 도덕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명사(名詞)는 춘추시대 말기에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과 다르다는 점이다. 즉 양계초 등은 “노자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왕후'(王后), ’왕공‘(王公), ’만승지국(萬乘之國) 등 문구(名詞)는 춘추시대 사람들이 쓰던 용어가 아니다. 또 “인의(仁義)라는 글자도 맹자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문구다. 그래서 도덕경에서는 사용될 문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도덕경의 문구에 반영되어 나오는 사상과 내용은 도덕경이 만들어진 시대와 부합되지 않는 문구들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도덕경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많은 학자들은 춘추시대에 나온 책(古籍)들 중에서 적지 않은 증거(양계초가 부정하는 문구)들을 찾아서 도덕경에서 집중적으로 반영한 춘추말기의 사회현상들을 증명해내고 있다. 양계초 등이 춘추시대의 용어가 아니라고 말하는 왕후에 대하여 살펴보자.

《周易》(주역) 〈蠱卦〉(고괘)조 上九에 보면, “왕후를 섬기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충실히 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 朱熹 撰, 《周易本義》, 四庫全書薈要, 길림인민출판사, 2000, 32쪽 참조)라 하여 주역에 ‘왕후’라는 용어가 나온다.

또 주역의 〈離卦〉(리괘)조 六五에 보면, “65에서 말하는 길리(吉離)는 곧 ‘왕공’을 말한다.”(象曰, 六五之吉離王公也, 주회 찬, 앞의 책, 39쪽 下 참조) 이와 주역에 벌써 ‘왕후’와 ‘왕공’의 용어들이 보이고 있다. 그러면 주역이 만들어진 시간은 언제인가. 주역을 누가 지었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주역본의 제3권, 〈繫辭上傳〉(계사상전)에서, 건곤(乾坤)이 천지를 만들고 인간(남녀)을 만들고, 인간의 귀천을 만들고, 강약(强弱)과 강유(剛柔)를 만들고, 길흉의 조화를 만들었다고 한 다음, 〈繫辭下傳〉(계사하전) 1장에서 “ 옛날에 포희씨(包犧氏=복희씨)가 올려보아서는 하늘에서 象을 보게 하고, 내려 보아서는 땅에서 법(法)을 보게 했다. (중략) 이때 처음으로 팔괘를 만들어 ‘신명의 덕’(神明之德: 움직이고 멈추고 살고 죽는 성질)에 통하게 하고, 만물의 정(萬物之情: 바람, 벼락, 폭풍, 비, 눈 홍수 등 자연의 이치)를 보도록 했다.(원문 생략, 출처: 앞의 책, 75쪽 下)

주역의 말을 믿는다면, 복희씨가 8괘를 만들었다. 이것을 신농씨가 64괘로 발전시키고 주문왕이 괘에 사를 붙여 주역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의 ‘왕후’니, ‘왕공’이니 하는 용어가 주역에서 나오고, 주역은 주(춘추시대)나라 때 만들어졌으니, 도덕경에 나오는 왕공과 왕후는 이미 춘추시대에 있었던 용어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도덕경은 분명 전국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황보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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