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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도덕경 강의

노자의 행적 2

by anarchopists 2019. 11.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2/25 05:40]에 발행한 글입니다.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분명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史記》에 분명히 “노자가 주왕실의 쇠망을 보았다(老子見周之衰)고 쓰여 있다. 이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본다면 노자가 주를 떠난 시기는 서주의 멸망시기인 기원전 520년에서 516년 사이다.

다음으로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것 또한 정확한 사실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노자가 살았던 시기는 기원전 571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공자에 비하여 20살이 더 많다고 본다. 공자의 생몰연대는 확실하다. 때문에 공자가 노자에게 어떤 가르침을 청했다는 사실은 당시 상황에서 완전한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즉 공자는 늘 이렇게 강조하였다. “아래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耻) 마라(不)”(不恥下問), “세 사람이 길을 가다보면 꼭 내가 본받을만한 사람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 더구나 노자 이사람이야말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공자는 주나라에서 노자를 보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중국 당(唐; (618~907)나라 시대 한유(韓愈, 768~824)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공자가 노자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말에 대하여 치욕의 본질로 여겼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고 애써 배척하였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 살았던 유학자 최술(崔述, 1740~1816) 또한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였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유학자들은 “공자가 앞서 낳고, 노자가 후에 낳다”(孔子在先, 老子在後)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 존공파(尊孔派)들은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 중에 공자의 사상을 앞지르는 사람은 없었다는 주장을 해왔다. 여기서 노자가 춘추시대 말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史記》, 《左傳》(좌전), 《孔子家語》(공자가어), 《禮記》(예기), 《莊子》, 《列子》 등 춘추전국시대의 고서 중, 많은 곳에서 “공자가 기원전 522년 周에 가서 노자의 이름을 사모하여 그를 예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양계초(梁啓超, 1873~1929)를 비롯한 현대 신유학파들도 사기에 나오는 노자행적과 이름에 대한 기록에 대하여 “홀리고 믿기지 못하겠다‘(迷离惝恍)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노자의 성은 분명 李씨다. 그리고 이름은 耳이고 자는 聃이다. 이로 볼 때 사마천은 분명히 노자가 李耳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이와 노자는 동일인물이다. (2011. 2,27, 황보윤식)

* 참고: 좌전: 공자는 노나라 은공원년[기원전 722년]에서 애공 14년[기원전 481년]까지 242년간 노나라 12대 임금의 역사를 편년체로 엮었다. 이것이《春秋》(춘추)라는 역사책이다. 후대 이 춘추라는 역사책은 많은 해설서가 나온다. 이러한 해설서 중 《左氏傳》(좌씨전), 《穀梁傳》(곡량전), 《公羊傳》(공양전)을 일컬어 ‘춘추삼전’이라 한다. 이중 좌씨전을 좌전이라고 하며 지은이는 좌구명(左丘明 또는 이설)이다.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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