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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도덕경 강의

노자의 행적 1

by anarchopists 2019. 11.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2/23 06:58]에 발행한 글입니다.


노자의 행적 1

오늘은 노자의 행적에 대하여 알아보자. 노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중국 한나라 때 사람,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경~ 85경)이 지은 《史記》(사기, BC 108~BC 91년경 편찬, 중국 한 무제 때 쓰여진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효시)권63 〈老莊申韓列傳〉(노장신한열전)3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분석해 볼 수 있다.

1. “노자는 초(楚, 춘추시대 초나라가 아닌, 전국시대 초를 말함, 초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털어 기원전 771~221년까지 존재하였음)나라, 고현(苦縣) 여향(厲鄕)의 곡인리(曲仁里: 중국의 지금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이다.) 사람이다.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耳: 노자는 귀와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자(字: 옛 사람들은 본인의 이름은 부르지 않고 별도의 이름을 불렀다. 특히 장가 든 아들을 집안어른들이 부를 때 쓰는 이름이 자이다. )는 담(聃: 귀가 크다는 뜻, 노자는 귀가 유난히 컸다고 한다. 노자의 자를 伯陽이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대(唐代) 사마정(司馬貞)은 〈史記索隱〉(사기색은)에서 이는 後漢(후한) 허신(許愼)의 설이라 하고, 이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이다. 후에 성장하여 주(周: 여기서는 봉건국가의 주황실, 곧 전국시대의 東周을 말함)나라로 가 동주의 도서관(수장실守藏室)의 기록담당(史) 관리를 지낸 바 있다.(楚苦縣厲鄕曲里人也, 姓李氏, 名耳, 字聃, 周守藏室之史也, 《史記》 卷63, 〈老莊申韓列傳〉 第3, 출처: 앞의 책, 11쪽上)

2. 이때 노(魯: 춘추시대 말기)나라 출신인 공자(孔子)가 마침 주의 서울(뤄양洛陽)에 있었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 만났다. 그리고 노자에게 예(禮)에 질문을 하였다. ......(노자와 대화를 마친 공자는 제자들에게 노자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나는 안다. 새는 날 수 있다, 고기는 헤엄칠 수 있다. 짐승들도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새, 고기 들짐승은 인간의 화살과 낚시와 화살에 의하여 구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라 올라서 어느 이에게도 구속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오늘 보니 노자는 용과 같더라. 노자는 도(道)와 덕(德)을 닦아서, 학문만 드러내려할 뿐, 스스로를 숨기고 무명(無名)을 추구하는 자이다.(이를 곧 ‘자은무명((自隱無名’이라 한다) (원문생략, 출처: 앞의 책, 12쪽上)

3. (공자는 계속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는 전국 7웅시대에 들어와 동주의 봉건왕실이 몰락하자, 주를 떠나 떠돌다가 관(關: 오늘날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신안현新安縣의 동쪽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으로 추정)의 치소(治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 관리(關令: 우두머리, 大夫벼슬)인 윤희(尹喜)가 노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희는 노자가 진인임을 알았다. 그런데) 노자가 장차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겠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선생께서 이제 은둔하시려 하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强, 사고전서에는 疆으로표기함) 저를 위하여 글을 남겨주십시오” 하니 노자가 상하편의 글을 써주었다(修) 그리고 노자가 윤회에게 “도와 덕의 의미를 5천여 자로 담았다”(言道德之意五千餘言)라고 말하고는 떠났다, 그로부터 그의 삶(所終)이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일설에는 노자가 함곡관에서 푸른 소[靑牛]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고 한다. 원문생략, 출처 앞의 책, 12쪽上)

지금까지 이야기를 가지고 《史記》에서 사마천이 말하는 노자의 행적에 대하여 분석해보자.
첫째, 노자는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이씨, 이름은 담이다. 그리고 東周王室의 벼슬(도서관장의)를 지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한다면 노자는 분명 西周(춘추말기)에 태어나 東周(전국시대)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둘째, 공자가 주周에서 노자를 만나 예禮와 관련이 있는 문제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리고 공자는 노자에 대하여 지극히 높이 평가하였다. 즉 노자를 거대한 용(巨龍)으로 봄으로서 노자를 매우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셋째, 주왕실이 쇠락하자 노자는 주를 버리고 따난다. 그리고 함곡관에 가서 그곳 관리 윤희의 청을 박아들여 도덕경 상하권을 지어준다.

넷째, 사마천은 노자가 함곡관을 떠난 이후 노자의 최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함곡관이 어디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의 논쟁거리를 만들어주었다.

다섯째, 사마천이 《史記》에서 기록하고 있는 노자의 행적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기록이 다른 사서와 사마천의 기록을 비교하여 서로 다른 관점들이 생겨났다. 그러면 다음에 노자의 행적에 대하여 여러 기록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 보자. (2011. 2.25, 황보윤식)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서울신문(2013.1.26.일자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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