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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농부, 그리고 자본주의와 계급분화

by anarchopists 2019. 10.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10/27 06:12]에 발행한 글입니다.

농부, 그리고
자본주의와 계급분화

WTO(世界貿易機構, 1993), FTA(自由貿易協定, 1995) 이후 한국농촌과 농업은 위축되고 망해가고 있다. 대한민국라는 국가의 단견적이고 미래적 경제가치에 무지(無智)한 농업원칙외적 강제행위(정책)로 농촌은 도시화되고 농민은 자본농/기업농으로 억지춘양 노릇을 하고 있다. 농촌의 도시화는 농촌을 생산지가 아닌 소비지로 전락시키는 짓거리다. 곧 농촌이 자본주의의 상업시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고 농업의 자본화, 기업화로 농민들도 자본농과 기업농으로 타락하면서 도께비 춤을 추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농촌의 농민들은 사장님 아닌 사람이 없다.

죄다 사장(社長)이다. 곧 기업농의 사장이라는 뜻이다.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만이 농지은행으로부터 싼 이자의 대출을 얻을 수 있다. 가난한 농민은 일반 은행에서 비싼 이자로 돈을 얻어 써야 하고 부자농/부농만이 농지은행에서 싼 이자로 돈을 얻어 쓸 수 있다. 이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행하는 농업정책이다. 이 때문에 하나의 모습이었던 농촌의 농민이 여러 모습으로 분화(分化)하면서 계층 간 격차의 심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제 농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농민의 분화형태를 살펴보자.

농촌은 결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배워서도 안 되고 그렇게 가서도 안 되는 곳이다.
 농촌이야말로, 타락하고 부패해 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사람다움)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최후 방어선이다. 그것은 농촌/시골이 순정(純正)의 인간정서를 배양시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의하여 인간의 선(善)한 정서를 배양하는 농촌이 사라지면 악(惡)한 인간범죄가 창궐하여 인간적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아비귀환의 세상이 된다. 그래서 농부는 자본축적을 목적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 농부는 그저 먹고 살면 된다. 이런 정신적 태도가 자연적인 삶의 태도요. 숭고한 농부의 정신이다. “우리도 도시사람처럼 잘 살아보자”는 생각은 낡은 우상을 신봉하는 가난뱅이의 천박한 근성이다. 얼(魂)이 없는 삶의 태도다.

농부는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부패하고 타락한 자본주의 수법을 배워서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명제(命題)를 세워본다. 그래서 ‘농부, 그리고 자본주의와 계급문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금 농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농민의 분화와 계층 간 격차의 심화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이야기 해볼까 한다.

일본의 마쓰다 기이치(1888-1968)는 농민의 양태를 정신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정신적 가치가 가장 낮은 단계인 생활적 농민에서 시작하여 예술적 농민, 정서적 농민, 철학적 농민으로 단계를 나누고 가장 정신적 가치가 높은 단계의 농민을 종교적 농민이라고 하였다.(홍순명, 《풀무학교이야기》, 부키, 2006, 83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구분은 농민이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하느냐와 농업의 가치를 신성(神聖)함에 둔데서 나온 기준이다. 글쓴이도 ‘농부의 얼’(農魂)에 근본을 두고 다른 각도에서 우리나라 농부의 양태를 그려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살아가는 농부의 종류는 많다. 지역별로 나누면 도시에 사는 부재농부(不在農夫=地主)와 농촌에 사는 재지농부(在地農夫=中小農/小作農)가 있다. 부재농부를 현대식으로 부르면 자본지주이다. 자본지주는 볼 것도 없이 그 성질상 좋게 봐줄 수 없는 더러운 부류이다. 농사를 짓는 농부만이 진정한 농부다. 여기서는 시골농부/재지농부만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성격으로 보았을 때, 시골농부에는 토박이농부/토착농부 이외에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시대적 환경에서 귀농한 농부들이 있다. 곧 귀농농부다. 귀농농부는 그들이 도시에 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직업의 성격에 따라 농부의 성질도 달리 한다. 생활농부, 학자농부, 자본농부가 그것이다.

토착농부는 대부분 생활농민이다. 이를 생활농부라고 부르자. 이들은 조상 대대로이든, 필연이든 숙명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없이 힘든 농사를 짓는 농부이다. 이들 대부분은 ‘농혼’(農魂/농얼: 농사를 짓는 사명감 내지 농업에 대한 신앙적 태도를 말함)이 없다. 이들에게는 농업이 사회적, 경제적(선택적) 직업이 아니고, 필연적 생업이다. 농사에 대한 철학이나, 농사에 대한 자긍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들에게서는 자본주의 개념에서 나온 직업(職業)이라는 개념을 알 필요가 없는 분들이다. 우리가 말하는 생업(生業)과 직업은 전혀 개념이 다르다. 생업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택되지 않는다. 팔자다. 필연이다. 하지만 직업은 선택(偶然)이다. 직업은 선택이기 때문에 농업을 선택 안 해도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업은 농업 말고는 먹고 살 수 없는 필연적 숙명(宿命)라는 뜻이다. 농촌에 살고 있는 토착농부는 숙명적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분들이다.

토착농부는 농사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분들이다.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자기한계를 가진, 선택의 여지가 없는, 태생적으로 농사를 짓는 분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다. 또 그렇게 할 재주도 부리지 못한다. 그래서 생활농부는 자연 그대로 순수한 농부다. 세상에 때를 묻히지 않는 농부다. 이러한 농부가 요즈음 농촌에는 드물다. 생업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아직도 순수한 농심(農心)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농촌마을의 아름다운 시골스런 선(善)한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다. 이들의 얼굴은 보기에 꽤쩨쩨하다. 입은 옷도 수십 년 입고 다니는 것처럼 허름하고 낚았다. 얼굴에 맑은 미소도 없다. 살고 있기에, 먹고 살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도 농사를 짓고 있다. 시세말로 힘이 없는 분들이다. 이들은 시골집을 떠나 도시로 나가 살고 있는 소식 없는 자식들을 한 없이 기다리며 산다. 그들 자식들도 가난을 대물림 한 탓에 고향의 노인들을 도와줄 경제적 여력도 없다. 가난의 세습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삶의 출발점이 다르다. 삶의 출발선이 다르게 그어 있다는 말이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앞선 출발선에서 인생의 마라톤을 시작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자 집안의 애들보다 출발선이 한참 뒤로 물러나 그어져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사다리법칙을 가지고 있다. 부잣집/자본가/기업가 집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이미 사다리의 맨 위의 계단을 밟고 간다. 그래서 가난뱅이 집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아무리해도 사다리의 윗 단을 밟을 수 없다. 부잣집 애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앞지르려고 하면 사다리는 넘어진다. 이게 자본부의 사회의 ‘사다리 법칙’이다.

농촌의 생활농부들은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가면 곧 사라질 분들이다. 다시 말하면, 생활농부는 없어지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만큼 우리 농촌이 도시화되고 농민이 자본농으로 변해 간다는 말이다. 생활농부들은 사람 중심의 농사나 돈 중심의 농사라는 말도 모른다. 그저 살아 있기에 농사를 지을 뿐이다. 죽기 직전까지 농사를 짓다 죽을 뿐이다. 이들은 근대적 삶의 지식(知識)에 무지하다. 그리고 서양식 교양(윤리, 도덕)에도 무식하다. 따라서 환경이나 생태 등, 자연환경보호와 서양식 교양에 대하여 알 필요가 없다. 다만 인간적일 뿐이다. 그냥 농사지어 먹고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학자농부/유식농이나 자본농부/기업농/자본농은 생활농부와 달리 자기 재주를 가지고 시골에 산다. 먼저 자본농부를 보자. 자본농은 토착농민 중에 부를 세습하여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到來)와 함께 자본농으로 변신하여 사는 농부/재지자본농도 있지만, 타지에서 흘러들어와 돈을 목적으로 사는 천박한 농부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타지에서 들어온 자본농은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편승하여 나랏돈을 적당히 또는 독점적으로 받아가며 자본농을 꿈꾸고 있는 농부들이다. 한 마디로 자본권력의 우산(雨傘) 아래서 부의 축적을 탐익(貪益)하는 부류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시골의 농업관련 관청 및 그 안에서 생각 없이, 중앙부처의 지시(指示)에 마냥 추종하는 관료들과 손잡고 국가시책에 충실히 부응하는 농민들이다. 이들은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돈(資本)이 중심이다. 사람 중심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다. 돈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다.

농촌의 농업관련 기관들도 국가시책에 부응하기 위해 이러한 농촌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추긴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박정희식 천박한 ‘잘 사는 농촌’. ‘잘 살아보세’만을 가르친다. 낡은 우상 중 하나인 ‘새마을운동’식 썩은 삶은 방식만을 가르친다. 인간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것을 말해줄 줄도 모른다. 그저 돈만 잘 벌면 된다. 자동차가 두 대면 되고 남보다 좋은 자동차를 타면 장땡이다. 남보다 좋은 냉장고 가지면 되고, 남보다 메이커 옷을 입으면 된다. 이들은 또 명품(名品)을 최고로 여긴다. 모든 생산물에 ‘명품 글자’(名品字)을 붙인다. 남보다 수확을 많이 하고 명품 농산물을 만들어 최고의 값을 받으면 된다. 사람에게 해로운 화학농약과 화학비료, 그리고 독한 제초제를 뿌려서 모양 좋고, 때깔 좋은 농산물(한국의 GAP제도)만 만들면 된다. 사람의 참 먹거리하고는 상관이 없다.

자본농들은 시골농촌에서 죄다 사장님으로 불린다.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가 이들 대화의 주된 화제다. 김 사장이 무슨 차를 타고 나들이 하는가가 이들의 화재거리다. 이들은 타락한 자본주의를 농사에 끌어들여 돈 벌 궁리만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식 펀드를 농사에 활용한다. 농촌에, 농업에 투자개념을 끌어들인다. 그것이 더러운 짓거리임을 모른다. ‘농촌사랑’과 ‘농민생활 안정’을 위해 생협(生協,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에서 시작한 ‘나무 한 그루 사기운동’이 자본을 끌어들이는 수단화하였다. 자본농부들은 인간과 환경, 자연생태적 생각보다는 이를 이용한 돈벌이로 활용한다. 이들 자본농은 홍순명이 말하는 ‘예술적인 농부’다. 농산물에 부가기치를 높이거나 좋은 가격을 받을 시기만을 골라 농산물을 내다파는 등 경영의 묘를 살려가며 농사를 짓는 농부다.(홍순명, 앞의 책, 2006) 사람의 먹거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돈만 벌면 되는 농부다. 이들 자본축적에만 몰두하는 자본농에 의하여 농촌은 빈부의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키는 현상이 깊어가고 있다. 이 결과 농촌의 사회현상은 도덕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농촌사회전반을 이끌게 되고, 농촌의 인간은 인격적(人格的) 가치보다 치부적(致富的) 가치가 인품(人品)의 척도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빈농들의 자괴감을 불러오는 한편 타락하고 부패한 자본주의에 물든 농촌을 만들어 가고 있다. 결국 농촌의 도시화, 농부의 자본화/도시화로 이 나라 정신적 마음의 고향(故鄕)은 선(善)한 정서를 생산하는 곳에서 사회범죄를 배양하는 곳으로 바꿔가고 있다.

다음은 학자농부다 이들은 소위 식자층/유식농/학자농이다. 근대 지식과 서양식 교양과 윤리가 최소한 몸에 밴 농부들이다. 학자농부에도 종류가 많다. 도시에서 지식층/지도층 인사로 살다가 뜻이 있어 농촌에 들어와 사는 학자농도 있고, 노년을 농촌에서 보내기 위해 들어와 농사를 여생의 업으로 삼고 사는 학자농부도 있다. 이들에게는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자 하는 학자농부도 있지만, 농사를 여가로 삼는 학자농부도 있다. 농업을 생업으로 삼는 학자농은 농사를 돈벌이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 곧 우주와 생명에 관한 철학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농부를 말한다. 농혼(農魂)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농부다. 한국농촌에는 최근에 이러한 농혼을 가진 농부들이 많이 생겼다. 미문(未聞)하여 잘은 모르지만, 전라도 변산지방의 윤구병(尹九炳, 1943~ ) 학자농부가 처음인 것으로 안다. 그 뒤를 이어 많은 학자들이 학자농부가 되고 있다.

학자농은 일단 학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전공분야에서 학문을 연구하다 뜻 한 바 있어 농촌에 들어와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나름의 농사철학(農魂-농얼/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사명은 농촌의 도시화를 막고 농부의 자본농화를 막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시대 흐름의 대세를 막는 일이라서 그리 쉽게 성공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속도를 느리게 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 두뇌구조가 썩은 정치권력과 치부에만 눈이 먼 자본권력들이 서로 결탁하여 농촌을 자본시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자기 나라 안에서 ‘제국주의식 전쟁’(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가 자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점령하는 전쟁을 말함)을 일으킨 이상 신채호가 말한 “무전무병”(無錢無兵: 권력 없고 돈이 없는 농민)의 농민을 끌어안고 그 피해를 최소한 받을 수 있게 할 농부들은 학자농부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을 가진 학자농부 또한 적다는 게 문제다. 대부분 농촌에 들어온 학자농들은 고령인데다. 사회개혁의 의지가 부족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농촌이 자본화/도시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 농촌의 농부를 이렇게 구분하였지만 이들 농부들은 성질의 차이는 갖지만, 신부상 차이는 없다. 다만 인품이 다를 뿐이다. 항간에서 말하는 인간격의 높고 낮음으로 말한다면 가정 높은 격의 농부는 생활농부이고 다음이 학자농부이고 가장 인간격이 낮은 농부는 자본농부라고 말 할 수 있다. 자본농부는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돈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자본보다 사람이고 사람보다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환경과 가깝게 사는 생활농부가 가장 격이 높고 다음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는 학자농부이고 가장 천박한 농부는 사람보다 자본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 자본농부다. 사람의 계급으로 볼 때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Rousseau, 1712~1778). 가 말한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생각하는 인간”(《에밀》, 1762)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 즉 자연인이다. 이 말을 본 글에 대입하면, 자연인에 가장 가까운 농부는 생활농부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농부는 학자농부이고 생각이 없는 농부는 자본농부이다.

결국 농촌에 귀농한 학자농부들이 늘어나면서 농촌은 다시 지적 계층분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아직은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경제수준의 향상과 인간수명의 확장은 귀촌과 귀농을 부추기게 되고 이의 결과는 농촌의 지적 사회계층의 분화를 심화시켜 나갈 우려가 있다. 하여 자본농에 의한 빈부격차의 심화와 함께 지식농에 의한 지식격차의 분화를 심화시키면서 농촌은 자본시장으로 전락하는 시간이 빨라지고 농민의 자본농화는 갈수록 심화되리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타락하고 부패하는 농촌이 안 되도록 막을 수 있는 귀농인구/학자농부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4. 10.21, 초고, 2014. 10.27 수정,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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