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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함석헌은 말한다.-역사교과서 개정논의 중단하라

by anarchopists 2019. 10. 2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11/25 06:17]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은 말한다.
역사교과서 개정논의 중단하라

요즈음, 70~80년대 독재권력의 계승자들이 ‘민주주의 꽃’이라는 미명아래 가소롭게 치러진 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다시 장악하였다. 이 때문에 진보적으로 발전해야 할 대한민국이 다시 주춤거리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역사교과서 수정담론이다. 이에 대하여 함석헌 선생님은 다음과 비판한다.

“바름이란 내게 좋기 위하여 역사적 판단을 구부리지 않는다는 말뿐이지, 도대체 판단하기, 해석하기를 금하는 것이 아니다. 주관의 주(主)는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참 나지, 서로 충돌하는 작은 나, 거짓 나, 사(私)가 아니다 바른 기록을 하기 위해서는 뚫어보는 해석하는 힘이 필요한 데 그것은 산 나만이 할 수 있다
.”(《함석헌저작집》, 30 한길사, 2009, 45쪽)

여기서 “산 나”는 역사학자, 또는 역사를 읽고 말하는 사람을 일컬을 수도 있다. 또 “판단하고 뚫어보는 해석하는 힘”, “역사에서 말하는 참은 뵈는 그대로 찍은 사진이 아니다. 뚫어보는 화가의 눈이다.”라는 말은 곧 사관을 말한다. 전체의 객관성을 잃어버린 나만의 객관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지금 ‘7080독재권력’의 계승자들은 나만(권력유지)의 주관성을 가지고 전체의 객관성을 뭉개버리려, ‘역사교과서 개정’ 운운하고 있다.

또 함석헌은 ‘민중[人民]이 역사의 주체’라고 말한다.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역사방법론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일제강점기 신채호 등을 위시한 역사가나 현대 한국의 강단사학을 담당하고 있는 역사가들도 모두가 역사의 주체는 민중(人民大衆의 준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물들을 보면, 말과 글이 다르다. 가령 신채호의 경우, 무산대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해놓고 그의 글에서 무산대중이 지배층에 저항하는 사건을 하나도 다루고 있지 않다. 곧, 고려시대 지배층끼리의 권력싸움인 ‘묘청의 난’(妙淸의 亂,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一大事件이라 일컬음)을 다루면서 고통을 받고 있던 민중들의 저항운동(우리나라 최초 노예해방운동인 만적기의萬積起義)은 다루고 있지 않다. 박은식 또한 동학농민혁명운동(東學農民革命運動)을 “甲午東學之亂”(갑오동학지난)으로 적고 있다. 이와 함께 최근 강단사학자의 역사서에서도 지배층의 수탈로 고통을 받는 대중들이 지배층에 항거하는 사건을 모도 ‘난’(亂, 만적의 난 등) 또는 ‘반란’(叛亂, 농민반란 등), ‘민란’(民亂)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북한의 사학자들도 ‘농민기의’를 ‘농민항쟁’ 또는 ‘인민투쟁’, 그리고 기의(起義)를 일으킨 농민을 ‘폭동군’으로 적고 있는 수준이다. 민중들의 지배층에 대한 저항은 폭동이 아니다. 새롭게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창조하기 위한 ‘起義’로 봄이 마땅하다고 본다.

이와 같이 인민[民衆]의 역사적 위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의 차이는 크다
. 역사의 주체가 인민이라고 보면서도 그들 행동의 당위성을 깎아내리는 표현은 어딘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보면서도 그들의 역사적 행위를 지배층의 입장에서 역적(逆賊), 반란, 역난(逆難), 민란, 농민난(農民亂)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모순이다.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본다면, 착취적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서술방식을 탈피하여 사회진화를 추구하는 인민 중심의 역사서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앞에서 예를 든 바와 같이 일반적 역사연구에서 “동학농민의 난”이라고 할 때, 난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본 나라질서(군주 중심의 봉건적 국가질서)를 혼란시켰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를 인민 중심의 역사(“씨알의 역사”)로 다시 기록한다면 ‘동학난’이 아니라 “동학농민기의”로 표기함이 옳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인 이기백의 《韓國史新論》(한국사신론)에서도 동학난(‘東學亂’)으로 표기한 적이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회장으로 있던 〈우리역사바로잡기운동본부〉에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3.1독립만세시위를 하는 조선민중을 일제군경이 “진압”(鎭壓)했다고 기술하였음을 발견하였다. 하여 이의 시정을 당시 문교부에 요구하였으나(1984) 이의 시정이 으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진압”이 “탄압(彈壓)”으로 바뀐 것은 1996년 중고교 교과서부터이다. “진압”이라는 단어는 지배계급 입장에서 쓰는 개념이고 “탄압”은 인민(씨알)의 입장에서 국가권력에게 폭력을 당한다는 개념의 용어이다. 이렇게 역사는 누구의 입장에서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용어의 선택이 달라지듯이 역사는 ‘史觀의 未來性’을 가져야 한다. 독재권력의 계승을 위해 역사가 조작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역사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과거는 미래를 향한 꾸준한 움직임 속에서 계기적 발전을 통해 현재로 이행해 왔고 현재는 다시 계기적(繼起的)인 발생→발전→소멸(發生→發展→消滅)의 과정을 통해 미래를 창조해 간다. 따라서 현재의 역사교과서는 우리 시대(현재)의 관점에서 보되, ‘미래세계의 인간형(人間型)’에 대한 교훈(인민을 통제하는 국가주의나 정부지상주의가 아닌, 자유와 평등, 평균과 평화로운 개인과 사회를 지향하는)을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이탈리아의 크로체(Enedetto Croce, 1866~1952)가 말했듯이 “역사란 현재적 삶의 유래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미래를 향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의 수정논의가 진보적 미래발전을 향함이 아니고 현재의 권력유지를 위한 역사교과서 개정 속셈이라면 안 될 말이다.

이 나라 ‘희망과 용기의 얼’을 지닌 역사학자 이만열은 다음과 말한다.
“역사는 무한한 바다와 같은 보고(寶庫)다. 물질로 형성된 것이 아니어서 만질 수도 없고 형상과 실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 시간과 공간은 너무 넓고 깊어서 온갖 보물이 페기물질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역사라는 時空 속에 뛰어들어 인간이 남긴 무한한 경험과 교훈을 찾아 공유할 수 있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서 과거를 현재와 미래의 삶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 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시 돌아보고 재해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나타나고 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인간의 기술이나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은 죽은 화석과 같다.”(이만열, 《역사의 중심은 나다》, 현암사, 2007, 12쪽)

이렇게 본다면, 역사는 ‘현재성과 현실성’(현재적 현실성)을 갖는다. 즉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事實)에 대한 역사적 입장에서 본 판단(判斷)과 해석(解釋)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곧 어느 시대 역사가에 의하여 선택된 ‘역사적 사실’일지라도 앞으로 오는 다른 시대의 ‘현재적 현실성’의 요구에 의하여, 현재 역사가에 의해 서술된 ‘역사사실’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가 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역사는 ‘미래세계의 인간형(人間型)’에 대한 교훈(국가지상주의와 제국주의가 아닌, 개인의 자유와 복지가 최대한 발휘되는)을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역사학은 결코 현실정치의 필요(독재권력 유지라는)에 의하여 역사해석이 마음대로 남용되거나 조작되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 말은 현 권력자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고치려는 발상은 인류의 살인마 히틀러와 같은 발상이다.(2014. 11.25,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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