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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평화

[김대식 3강] 간디와 함석헌의 메타

by anarchopists 2020. 1.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3/10 07:38]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대식, 제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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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와 함석헌의 메타-호도스와 메타-에콜로지, 그리고 메타-담론

-씨알의 길로서의 ‘삶숨’ 철학적 여정


참(satya)은 사랑을 내포하고 확고부동성(agraha)을 낳게 되므로 힘이라는 동의어로 통한다. 말하자면 참과 사랑 혹은 비폭력에서 태어난 힘을 뜻한다.” 간디에게 있어서 사티아(satya)는 진리의 법, 혹은 참이다. 그것을 달리 서양의 철학적 언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로고스다. 로고스가 자연에 편만해서 현현해 있다고 생각했다. ‘간디는 온 우주에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이 널리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자연 안에 신의 길이 있으며,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간디처럼 자연 안에 신의 이법이나 신의 참(진리)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른바 생태미학적 감수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간디에게 있어서 사티아는 크게 네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절대적 실재 혹은 신, 2) 진실과 일치하는 참된 지식, 3) 성실 즉 말과 사상에서의 진실, 4) 공정하고 정직한 정의 즉 행동에서의 진실이 그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도덕철학의 핵심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수단과 목적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듯이, 모든 대상과 행위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과 걸맞게 하라는 수도자적 태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간디는 수단과 목적이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일반적인 논리와는 달리 수단과 목적은 같이 가야하며 목적은 수단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는 철학적 구상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연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수단화해도 된다는 폭력적인 생각 자체를 종식시켜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아힘사를 통하여 간디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단식과 음식의 절제 등)하고 육신의 감정을 제어하여 파괴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로서의 존재론적인 삶을 살고자 애를 썼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삶은 비단 개인에게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전 세계적인 차원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간디가 사티아 혹은 사티아그라하를 외쳤던 것은 개별적인 가정 경제의 회복뿐만 아니라 지역의 경제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참된 행동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전 지구적 차원의 자본의 횡포와 획일적인 문화경제주의, 단일적인 정치적 억압에서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참(satya)을 궤뚫을 수 있는 눈이 먼저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자아에 대한 인식, 타자를 배려하는 생태적 경제가 같이 갈 수가 있다.

“전통적인 제1세계 중심의 종족중심주의와 환경이론이나 생태사상이 갖는 위장된 보편성과 전체주의 그리고 경제적 이익의 편향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특별히 경제 세계화를 이용한 단일의 금융체계를 통해 모든 생명경제를 빚으로 압박해 나가는 이 시대에 경제적인 현실에 대응하는 지역경제체제를 살리는 방식의 신학을 찾아내고 일의적인 생태신학만이 아닌 지역과 전통을 살리면서 자신의 독특한 생명지향의 신학을 추구하되 다른 지역의 생태신학과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negotiation) 그리고 연대를 통하여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면서 생명의 다양한 가치를 살려나가는 지역공동체의 생태신학을 추구해야 하겠다. 이를 위해서 포스트모더니티의 생태신학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세계관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지역성과 부분성을 인지하며 우리 삶의 생태적, 경제적, 인식론적인 조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생태적 인식, 생명의 물레질을 하려면 간디가 생각했던 것처럼 윤리와 경제를 분리하면 안 된다. 그가 산업화를 경제 목표로 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산업화로 인해서 실업과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도시민들에게만 경제력을 집중시키게 되어 결국 촌락의 경제적 빈곤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촌락민들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고 더불어 인도의 전통적인 수공업의 부활과 촌락 산업의 대중화를 꾀하려고 했던 것도 그러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간디의 경제철학과 윤리에 대한 관념은 자신의 삶의 영성까지도 동일하게 이어져서 자발적인 가난과 무소유를 추구하게 된다.-소유를 범죄처럼 여기기까지 하였다-심지어 인간의 육체의 존재이유는 빵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됨으로써 절대적 가난을 추구하고 육체적 욕망을 완전히 근절하려고 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3

길은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누구나 그 길을 선택할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다. 문제는 그 길이 갈만한 길인가이다. 신라말의 대석학이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三敎)에 대한 회통을 주장하였다. 어느 한 종교나 사상에 국한하지 않고 그것을 넘나들며 서로의 극단적인 것을 순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화극’(化極 혹은 順化)을 들고 나왔다. 인도의 간디, 한국의 함석헌은 종교와 사상을 넘어서 서로 통한다. 그들에게는 도그마도, 어떠한 배타성도 없었으며, 오직 민족을 위한 ‘길’만을 생각하였다. 진리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아우르는 위대한 실천을 위해서 종교를 넘고 사상을 넘었다. 그것은 오직 모두가 공감하고 소통하며 그리고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내기 위해서였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진리다. 인간의 행위 안에서 진리가 드러난다. “진리는 인간 본질을 떠나 있지 않다... 진리가 실현되면 사람은 저절로 귀하게 된다”고 말한 최치원의 인간 회복, 인간됨의 가치는 결국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통용되어야만 하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길이 있다. 지켜야 할 도리, 이법, 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너진다면 인간은 존엄성을 상실하고 만다. 인간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하는 올바른 길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우리 사회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부르짖는 세계화, 자본이 아니면 망한다고 위협하는 그노시스즘을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대안의 길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물질적 권력의 확대”로 인한 병폐를 막기 위한 새로운 생태적 길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생각함’이다. ‘깊이 파고 들어가는 생각’, 생생한 기운으로 깨어나는 것, 스멀스멀 일어나는 깨우침을 통하여 자기 반성적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길을 내기 위해, 길을 따라 가기 위해서 필요한 힘은 인간의 사유에 있다. 우리는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의 물레질이 멈추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간디가 빵을 얻기 위한 자신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타자를 위한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할 것을 보이기 위한 모범으로 물레질을 하였듯이,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한 존재자로서 사유의 물레질, 생명의 물레질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사유의 물레질과 생명의 물레질은 서로 자신을 깨어나게 함과 동시에 남을 깨어나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것을 함석헌은 ‘생각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생각은 관념적 활동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 즉 생각 행위이다. 생각과 몸의 움직임, 정신이 새록새록(生) 깨어나 일어나 봄,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覺)은 인간의 삶-숨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삶-숨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경제활동에 대한 간디의 생각은 단순하면서도 소박했다. 하루 한두시간의 물레질(카디Khadi운동, 물레를 손으로 돌려 짠 옷감)을 통해서 적어도 경제적 자급자족, 더 나아가서 지역경제공동체(촌락경제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간디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간디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도덕적인 것이다. 비록 간디가 산업화가 불가피하게 실업과 착취로 이끌리라는 그의 신념이 잘못임을 설득당하여 기계가 만인의 복지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또 다른 도덕상의 이론(異論)이 여전히 남아 있다. 즉 만일 생산이 몇몇 산업 중심지에 집중되고, 그 분배를 위해 복잡하고 성가신 방법들이 채용된다면, 부정직한 사람들이 사기와 모리와 투기의 기회를 가지게 마련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런 것들은 모두, 각자가 자신의 용도나 바로 이웃에의 분배를 위해서 자기 손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자급자족의 단위로 구성되는 지방분권화된 농촌경제를 채택함으로써 비로소 제거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박하고 목가적인 경제질서를 인도에서 이룩하려는 것이 간디의 꿈이었다.”


물레질은 결국 삶-숨을 영위 할 정도로만 적게 만들고 적게 소비하는 생태적 생산과 소비 공동체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선구자적 외침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나 세계는 후기자본주의사회 속에서 여전히 과잉생산과 과잉소비행태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자연에 폭력을 가하고 소비자를 우롱하며 도둑질하는 자본가의 횡포 속에 생태정치공동체의 실현은 간디의 물레질 속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물질에 있지 않고, 무한한 소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디는 깨우치고 있는 셈이다. 소박한 삶의 길, 지나친 욕망을 잠재우는 금욕적 삶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경제성장논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간의 길을 모색하고 나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의 상징성 즉 생명의 상징성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레질은 물레길이다. 사티아그라하는 정신의 힘이 밖으로 드러나 착취당하는 민중이 살고, 폭력을 당하는 자연이 사는 새로운 길을 낸다. 그러므로 사티아그라하라는 간디의 정신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점차 물레걸음(천천히 바퀴를 돌려서 뒷걸음질치는 걸음)을 해야 한다. 일찌감치 그 물레걸음을 사신 이가 예수다. 함석헌은 그를 두고 비폭력자라고 단정 짓지 말자고 한다. 그는 단지 통으로 사신 분(全人)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오로지 부분이나 분리가 아니라 전체를 생각하며 그 전체 즉 통을 살리기 위해서 몸을 사르신 분이라고 말한다. 폭력은 나만 옳고, 나만 살자는 것인데, 예수는 그에 맞서 전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신 산 숨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간디도 마찬가지지만 함석헌 역시 자신 스스로 이성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가 하나의 인격으로 역사 안에서 자라고 있고, 역사는 새로운 예수의 인격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 함석헌 자신이 예수의 길을 가고자, 다시 말해서 전체를 살리고자 물레걸음을 친 사람이다.

문명적 자본주의는 기계적 걸음, ‘달아다니는 걸음’이다. 그런데 간디와 함석헌의 걸음은 ‘물레걸음’이다. 느릿느릿 주위를 살피며 생명적인 전체와 생명을 통으로 나누고 함께 하려는 걸음인 것이다. 달아다니는 걸음은 나 살자고 다른 사람, 다른 생명에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새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이 다니는 길인 ‘다님길’에는 온갖 생명이 함께 춤을 추는 물레걸음을 할 수 있는 생명의 다님길, 생명의 물레길이 생겨나야만 한다.(김대식, 내일 계속)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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