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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과 아나키즘

함석헌의 평화론

by anarchopists 2019. 10. 2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8/07/18 04:5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 협화와 자유를 위한 평화인문학적 초립을 벼리다!”

평화는 ‘같이 살자’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함석헌은 <우리가 내세우는 것>이라는 씨ᄋᆞᆯ공동체의 사유와 행동 근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씨ᄋᆞᆯ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습니다.” 함석헌에게 있어 비폭력은 평화와 등치되는 행동적 사상 개념이다. 평화라는 말은 입에 올리기에 가볍지 않다. 제법 무게감이 있는 말을 이론과 실천의 담론으로 풀어낸다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더욱이 인류 역사상 평화로운 적이 별로 없었던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면, 평화라는 담론이 없어서 평화롭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여러 종교들과 철학에서 말하고 있는 바 평화와 사랑, 조화라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음에도 여전히 평화라는 말이 실효성을 갖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싸우지 말고 평화를 이룩해 보자는 예수나 간디와 같은 이들의 외침은 여러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왔다.
헤겔철학에 입각하여 『전쟁론』을 저술한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폭력의 폭력성과 강제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력은 폭력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하여 발명해 낸 기술과 과학이 여러 가지 발명품으로써 스스로를 무장한다... 폭력, 즉 물리적 힘은 따라서 하나의 수단이고,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의지에 강제적으로 복종하도록(따르도록) 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다.” 폭력을 통한 물리적 강제력의 극단에 전쟁이 있음을 설파한 기술답다. 그러나 비단 폭력이 외형적이거나 가시적인 것만은 아니다. 니체(Friedrich W. Nietzsche)가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조차도 자기를 잃고 방탕”한다고 했는데, 그 결과로 자유로운 정신, 이성의 자기인식, 그리고 정신의 표상으로서의 언어, 종교, 국가, 역사도 난맥상 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정신적 폭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인간의 폭력 문제에 맞선 함석헌의 비폭력적 저항을 달리 비폭력 정신운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석헌은 예수나 간디의 비폭력주의, 불살생의 평화론을 내세우면서 실천적 저항자로 노력해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저항적 평화론을 끊임없이 운동과 생성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씨ᄋᆞᆯ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 나가려고 힘씁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평화의 구체적인 지향점은 바로 ‘같이살기’운동이었다.

평화는 협화(協和)다!

그런데 같이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together나 with로만 부족하다. 거기에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일종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공동체적 감각(Gemeinsinn; common sense)이다. 인류의 공통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통해서 같이살기를 표방한 함석헌은 ‘전체’(wholesome)를 위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그러기 위해서 협화(協和, harmony)라는 것을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방식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간의 근본 바탈로 삼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 언어, 역사, 종교, 국가, 자연, 통일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의 평화담론을 위한 개념들과 그에 대한 시각들은 하나 같이 고착화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것 역시 타자에 대한 맹목적인 강요나 강제를 넘어서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맥잡기가 간혹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에 언어에 대한 지체성(의미나 뜻 지연), 역사에 대한 현상학적 태도, 종교에 대한 절대적 규정을 벗어나려는 시도, 국가주의를 극복하려는 세계시민적 주체성의 확보, 범생명적 인식과 우주적 평화, 중립적 국가론의 가능성 등은 모두 같이살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이 이미 씨ᄋᆞᆯ에 들어있다. 함석헌이 주창한 개념, 씨ᄋᆞᆯ은 전체와 개체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존재다. 하늘과 자아(인간)는 서로 운동의 변증법적 관계의 깨달음 속에서 한생명을 이룬다. 한생명으로서의 씨ᄋᆞᆯ은 단수성(singularity)이면서 복수성(plurality)이다. 그래서 복수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단수적 존재, 혹은 단독자를 배제하지 않는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성차, 윤리, 법률, 주거, 공간, 장소 등 어느 영역에서든 씨ᄋᆞᆯ은 한생명으로서 존재한다. 씨ᄋᆞᆯ을 번역할 때 people라고 한 것도 단수성과 복수성을 동시에 담지하도록 한 그만의 진지한 고려라고 할 수 있다. people이 라틴어 populus, 즉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기원한다는 점이 이를 섣부르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함석헌은 협화적 존재로서의 씨ᄋᆞᆯ의 과제가 “해방”과 “새로운 창조”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늘 짓눌렸던 단수적인 개별 민중과 복수적인 집단 민중이 해방되면서 모두가 같이 사는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협화주의 사상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씨ᄋᆞᆯ철학이다. 그것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협화적 운동이다. 개별자와 공동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생명적 운동성이 멈칫거리지 않고 같이살기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서 나아간다.
또한 같이살기, 같이 존재하기에는 결코 종교적, 종파적 숭배가 용납되지 않는다. 지배적 권력도 같이살기에 방해가 된다. 어디까지나 모든 씨ᄋᆞᆯ들은 역사적 주체라는 것을 알고 씨ᄋᆞᆯ과 씨ᄋᆞᆯ이 서로 연대하는 평화적 세계를 구현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협화는 그래서 수많은 씨ᄋᆞᆯ들의 힘[協]을 상징하는 것이고, 개별자들이 자신의 몫을 공유하는 생명적 의지[和]를 나타낸다. 나아가 씨ᄋᆞᆯ은 그렇게 여러 씨ᄋᆞᆯ들이 힘을 합하여 목소리를 내는 감성적 연대성의 미학으로 평화적 선(善)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와 같은 협화는 결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주체적인 의식으로 “자기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주체라는 말이 강조되는 것도 평화적 선을 다함께 성취하기 위한 각성된, 깨달은 씨ᄋᆞᆯ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간에 오해가 되고 있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아니라 개별자를 내포하는 전체를 지향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화는 상호부조를 통한 절대자유다!

같이살기의 시도들은 아나키(anarchie)와도 맞닿아 있다. 이는 폭력적인 경쟁을 타파하고 상보적이고 상부적인 삶(mutual aid)을 토대로 모두가 서로 도우면서 살자는 데에 공통적인 뜻을 두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협화는 아나키즘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면서 절대적인 자유, 즉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개인의 자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유를 위해서 체제, 제도, 국가, 민족 등에 대해서도 저항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아나키는 늘 슬프고 힘들다. 아니 위험하다. 구조와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던 사람들에게는 거기에서 탈피함으로써 또 다른 폭력을 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도 탈출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탈(脫)한 이후의(post)의 세계와 삶을 꿈꿀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영원히 안정된 다수집단(major)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가 더 클 것이다. 지금의 가족주의, (민중주의가 아닌 왜곡된) 민주주의, 자본주의, 종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 등의 체제적 울타리가 같이살기나 상호부조를 역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훈육된 안전망이 박탈(剝奪, deposition)될지 모른다고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한 평화는 어려운 것일까?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설정되는 순간 그 관계가 깨진다는 것을 사뭇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자유를 위한 탈출(ex-hodos)은 여전히 그 목적지인 평화로운 거처(post, positum)를 향한 여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르본대학의 도덕 및 정치철학 명예교수인 자닌 샹퇴르(Janine Chanteur)도 “평화? 그 길은 우리를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평화는 계곡들 사이를 연결해야 하는 봉우리의 길과 닮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철학자 탁석산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논하면서,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만족시킨다면 한국철학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그가 제시한 기준의 항목에 부합하는 한국의 현대철학자가 있다면, 필자는 단연 함석헌이라고 생각한다. 함석헌은 당대의 명료한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민중으로서의 씨ᄋᆞᆯ이라고 하는 보편적 인간(공동체)을 상정했고, 씨ᄋᆞᆯ 자신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 즉 자기 자신임을 계몽시키는 분명한 철학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나마 그 철학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일찌감치 절대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감행했던 시대적 현자인 함석헌으로부터 방편을 배운다면, 평화와 자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다고 본다. 다만 이제 그 탈출기(exodus)를 새롭게 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씨ᄋᆞᆯ들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기독교미래교육연구소 부소장이며, 종교학과 철학으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그리스도교 감성학』, 『함석헌의 평화론』,『아시아평화공동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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