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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과 아나키즘

질병 이후 격변의 시기, 인간의 망각과 애매모호한 사유: 자연이 답입니다!

by anarchopists 2020. 5. 5.

질병 이후 격변의 시기, 인간의 망각과 애매모호한 사유: 자연이 답입니다!

 

이 마뜩치 않은 상황에 무릎을 꿇었다는 데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체주의적 메시지에 내려앉은 인간 이성, 또 다른 하나는 미생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존재. 모호한 인간의 이 스탠스를 분석하고자 하는 필자 자신도 혼란스럽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미생물로 인해서 이동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매우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자는 바이러스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발생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항변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찌감치 득도를 하여 인간사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설파했던 부처의 혜안을 뒤로 하더라도, 우리가 언제부터 고통과 죽음이 아닌 생존과 불멸의 삶만을 따졌는지 적이 의구심이 듭니다.

그렇다고 이 사태에 대해서 냉철한 이성적 사유와 비판을 감행하는 것은 물론 몸소 바이러스의 현상과 이면을 짚어내면서 몸으로 살아내려고 하는 사람은 보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바이러스의 존재를 방제·박멸·퇴치하는 데만 목적이 있었지, 그 존재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과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일상이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의 흐름에 단절이 생기는 것을 힘겨워하는 사람들은 그저 이 바이러스가 지나가거나 국가에 의해서, 정부에 의해서, 의학기술과 제약기술에 의해서 인간 존재 자체가 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증명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정말 잠정적인 희망이 절대적 현실이 되었다고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그럴 듯한 개념으로 바이러스를 견디고 싸워보자는 것이었지만, 과연 지금 우리는 그 바이러스를 극복했는가는 의문입니다. 삶이 무너지고 경제, 교육, 종교, 관계 등이 새로운 시스템을 정비해야만 하는 상황이 초래되면서 인간은 바이러스에 걸린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고 더 힘겨웠으며 견디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 공포와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묻습니다. 이 바이러스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해답은 찾지 않았습니다. 아니 여전히 시스템과 국가, 정부에만 이 바이러스라고 하는 또 다른 생명현상을 떠넘기고 인간은, 우리는 자본주의적 향락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분석과 해석의 몫은 개인의 몫입니다. 개별자의 자유로운 사유의 몫입니다. 어느 체제가 아닙니다. 다시 생산라인은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하고 다시 무지막지하게 소비하는 삶의 시스템은 또 다른 바이러스를 몰고 올 뿐입니다.

인간의 삶과 그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바이러스는 적(hostis)으로 옵니다. 그런데 간혹 바이러스는 손님(hostis)으로 옵니다.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지 못할망정, 문전박대부터 하려고 한다면 소님은 적으로 돌변합니다. 어느 종교, 어느 철학이든 자신을 낳아 준 자연에 대해서 적으로 간주하라는 변종적(變種的) 목소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왜 시간이 갈수록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자꾸 적으로만 낙인을 찍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자신이 ‘죽을 수 없다’, ‘죽지 않았다’는 존재력 혹은 존재감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떠나고, 자신의 의식을 기계에 맡기면서 그 생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환상과 망각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죽을 수 없음, 아니 죽지 않겠다는 몸부림이 더 작고 연약한 생명체에 대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살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이러스의 시작은 우리 인간 자신의 잘못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난데없이 발생한 기이한 존재로서 인간을 해치려고 등장한 폭군으로 생각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판단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다시 무겁게 제기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묻지 않습니다. 묻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지나가 버린 또 다른 ‘한’ 종류의 바이러스면 되었지, 차후의 바이러스는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라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종교도 생태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경제도 이제는 생명적 존재에 대해 배려를 해야 합니다. 모든 자본가들과 정치가들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적 유기체로 보면서, 그들에 대한 폭력과 살생이 우리 전체에게 심각한 자멸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세기경 그리스도교 변증가 락탄티우스(Lantantius)는 “신은 낙원에서 인간을 추방하고 다시는 근접하지 못하도록 그 땅을 불로 감쌌더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낙원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인간이라면, 이방인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이 땅만이라도 더불어 살만한 낙원 비스무래하게 만들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낙원에는 어느 존재자도 우위에 있거나 열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 평등한 존재자요 협력자요 협조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세계가 아니라면 그 어느 곳에도 인간이 살만한 낙원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니체(F. Nietzsche)는 “도덕적 인간은 생리적인 인간보다 본체계에 더 근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본체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볼 때 도덕적인 인간이 삶의 본질에 더 가깝게 접근하는 것 같지만, 그러다 보니 삶을 부정하고 마는 반자연적인 인간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비판합니다. 반면에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충동적인 인간, 곧 생리적인 인간도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반자연적인 도덕적 인간도 탐탁지 않지만, 본능에 충실한 인간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은 이도 저도 아닌 듯합니다. 굳이 가른다면 후자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합니다. 결국 니체가 그렇게 극복하려 했던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

이럴 때 에코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글말과 입말, 그 무위(無爲)적 삶 곧 자연에 가까운 삶/자연스러운 삶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입기도 그만두고, 벗기도 그만두고, 서기도 그만두고, 엎디기도 그만두고, 찬송하기도 기도하기도 명상하기도 그만두고, 모든 것을 다 잊고. 잊어지도록 믿고, 그저 살려 주시는 대로 사는 것이 도리어 옳은 일 아닐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꿈꾸는 청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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