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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과 아나키즘

민중의 저항정신을 깨우친 함석헌

by anarchopists 2020. 4. 7.

민중의 저항정신을 깨우친 함석헌

 

함석헌(咸錫憲)1901년에 태어나서 1989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절대 자유를 추구한 인물이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고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기울인 적은 있었으나, 자신은 결국 무교회주의도 아니라고 선언한 것은 탈종교주의로 살아갔던 종교적 자유인의 여정을 잘 말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은 반항한다”, “반항할 줄 모르는 백성은 망한다고 외치면서, 당시 국가의 통치주의, 무력주의, 구속주의에서 평화정신, 세계주의, 비전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여기에 더하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부정하고 거부한 저항정신은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함석헌은 체제적 저항인입니다. 마땅히 저항해야 할 시대에 필연적인 저항을 몸과 맘으로 이끌어낸 행동철학자입니다. 격변의 시대가 지나 저항이라는 말이 무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시대의 기억을 끌어안고 사는 현재의 저항적 인물들은 독재의 현장, 산업화의 현장, 기계문명의 현장 속에 우뚝 서서 목울대를 세우고 글로써 그와 같은 현상을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한 사상가로 떠올릴 것입니다. 지금도 함석헌이 여전히 저항을 위한 철학적·사상적 목소리로 요청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운동의 기반은 어디서 연원한 것일까요? 함석헌은 예수와 간디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간디(Mahatma Gandhi;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의 비폭력 저항운동, 즉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파지)는 인도독립을 위한 중요한 정신이었습니다. 간디는 자신의 진리실험을 폭력적 저항이 아니라 사나운 힘을 쓰지 않는다는 비폭력 저항으로 일관했습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함석헌도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단식투쟁을 감행하게 됩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혹 무저항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을 우려해 함석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간디는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저항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죽어도 저항해 싸우자는 주의다. 다만 폭력 곧 사나운 힘을 쓰지 말자는 주의다. 그러므로 자세히 말하면 비폭력 저항주의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저항을 하자는 것일까요? 간디는 혼의 힘, 곧 참 자기[眞我]를 드러내면 된다고 보았습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아트만이 내면에 있으면 종교요 외면으로 표출되면 정치가 됩니다. 저항은 선동도 선전도 아닙니다.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한 자기 혼의 발로입니다. 함석헌에게 있어 저항의 길은 예수로부터 기원합니다. 그것은 맨 처음 원리, 자연의 길, 하느님의 길입니다. 본시 혁명은 맨 처음 원리, 곧 아르케(arche)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지배, 제도, 조직, 인위로도 인간의 절대 자유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그 아르케는 하나님 혹은 예수의 속성입니다. 인간의 절대 자유를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은 그 초월적 존재에 대한 부정이자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르케를 독점하거나 지배하려고 하면, 특정 집단이나 한 개인이 독재집단 내지는 독재자가 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르케(arche)는 안-아르케(an-arche)여야 아르케가 더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전제의 무화는 순수한 시원으로 환원(소급)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말입니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저항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탕에 순수 근원적인 실재를 가능케 하는 인격과 생명은 순수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압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비관계적 세력이나 강제력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합니다. 함석헌이 말하듯이 영원무한을 지향하는 인간이자 자유를 발전시키고 완전에까지 나아가려는 게 인간의 자연스럽고 순수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정치는 중심을 붙잡지 못하고, 경제는 자본가들에 의한 폭력적 착취가 심화되고, 종교는 진리와 상반된 세속적 집단으로 전락하고, 기후는 급변하여 우주의 미래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저항은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민중조차도 물질적인 주이상스(Jouissance)에 중독되고, 그 주이상스를 넘어서 초월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항은 인격이요 생성이라는 함석헌의 말은 적어도 인간이라면 자신의 고착화된 현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신적 틀[]을 만들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에 물들고 욕망에 매몰되어서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현실에 자족하지 못한다면, 저항해야 할 당위성보다는 안주하려는 무사유적인 일상인(das Man)으로 퇴보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다시 함석헌을 떠올리고 그의 사상을 더 깊은 사색과 담론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절대 자유에 대한 억압이 직간접적으로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나아가 반드시 실천적 저항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것도 절대 자유와 자존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한 민중의 강력한 인격적 욕구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악에 맞서고 선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존재, 그것이 인격적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인격은 나는 나다라는 자각, 정신, 자기 의식으로 확장됩니다. 생명은 나는 나다라는 자기 정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헌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저항을 말합니다.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하는 게 저항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적 자기는 자성저항”(自性抵抗)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무저항을 힘없는 무리들의 치기어린 몸짓으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무저항은 비폭력 저항의 한층 더 높은 저항운동입니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비폭력정신은 평화정신의 발로요, 반항정신은 평화정신을 위한 행동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맨 처음은 저항이자 자유입니다. 함석헌이 적시하였듯이 자유는 생명의 근본바탕입니다. 역사는 혁명적(to revolve)이라는 표현도 결국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re-volvere)는 몸부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맨 처음 자유, 순수한 자유를 얻기 위한 몸짓도 맨 처음에 있었던 것이지만, 맨 처음의 저항이 없다면 인간의 절대 자유와 자존, 협화(協和), 상호부조(相互扶助)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 자유와 자존을 위한 혁명적 운동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얽혀 있는 비순수의 관계를 풀어서(volvo) 다시 굴려 가져오기(advolvo) 위한 비폭력적 저항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혁명을 해야 하나님을 본다고 역설하면서 그 혁명은 조직으로 할 수 없다고 본 함석헌은 사회생활을 하고 역사를 이루는 것도 그 동기가 정치경제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역시 양심문제, 정신문제에 있다고 설파합니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민중의 정신이 깨이고 그것이 역사의 추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함석헌은 퍼시 셸리(Percy B. Shelley)의 시 <서풍에 부치는 노래>를 인용하면서 그 때를 내다보았습니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인간의 절대 자유와 자존을 강제하는 힘에 저항하는 것은 지금의 변종적이고 기형적인 자유 이후를 꿈꾸는 민중들의 적극적인 희망의 몸짓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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