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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분류없음

[제1강] 왜 지금 함석헌을 이야기하는가

by anarchopists 2020. 2. 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8/12/08 23:47 함석헌을 ]에 발행한 글입니다.


제1장 왜 지금 함석헌을 이야기하는가


김영호(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 인하대명예교수)


1.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사상가

21세기에 접어들기 직전 <타임>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과학자 아인슈타인을 뽑았다.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가 아깝게 그 뒤를 이었다. 서구적 시각과 가치관에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법하다. 동양적인 시각에서는 간디가 뽑혔을 것이다.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나 사상가를 꼽으라면 누구일까.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마 함석헌(1901-89)보다 더 마땅한 인물을 찾아내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는 20세기 고난의 역사 현장에서 자기를 버리고 사유하고 행동한 보기 드문 선비였다. 원래 참 선비가 그랬듯이 그는 단순한 지식인이 아닌 진정한 지성인이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하얀 수염을 흩날리는 그의 고전적인 풍모에서 ‘생각하는 사람’을 넘어서, 사유하는 (미륵)보살이나 노자의 심상을 떠올린다면 이상할 것도 없다. 함석헌을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인, 한 세기만의 인물이라 한들 크게 빗나갔다 할 수 없을 터이다.

그러면 함석헌은 누구인가?
그는 종교인, 철학자, 역사가, 교육가, 언론인, 문명비평가, 시인, 비폭력평화주의자, 사회개혁가, 공동체주의자 등 다양한 칭호를 붙일 수 있을 만큼 다면적인 사고를 펼친 사상가요 행동가였다.

미시적 전문가만 판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는 민족과 인류의 장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시각에서 거대담론을 펼쳤다. 그는 고전적 지행합일의 모델이었다. 그 말고 모든 험악한 시대에(일제, 소련군정,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 감옥을 자기 집처럼 들락거린 지사, 애국자가 또 있었던가. 그야말로 무소유로 일관한 우리시대의 보살이요 선비였다. 그가 있어서 ‘수난의 여왕’인 이 민족이 통과한 그 험난한 시절에 우리는 그래도 마음 든든했다. 시계 제로인 지금 그가 그리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너희가 진정으로 함석헌을 아느냐?” 묻는다면 누가 나설 수 있을까.
정보는 많아지지만 갈수록 사유의 함량이 작아져 가는 이 시대 지식인이 알기에는 그는 스펙트럼이 큰 그릇이다. 군자는 불기(君子不器)라 했듯, 된 인물은 이러저런 쓰임이나 분야로 규명될 수 없다.

된 사람 함석헌은 한 종교나 신학, 사상이나 학문 분야로만 조명하기에는 통이 큰 사상가였다. 오늘날 멸종위기에 있는 통합적 사유를 펼친 인문학자의 귀감이다. 학자들이 이러쿵저러쿵 조명하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다.

지금 학문분야의 ‘통섭’(統攝), ‘통학’(統學), 융화를 말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 모델이 될 함석헌을 통채로 이해하려고 하기는커녕, 그를 추종한다는 사람들이 함석헌을 분해하고 조각내서 팔아먹고 있다. 이 현실을 직시한 몇몇 (적어도 자기가 장님이라는 것을 알만한) 인사들이 전체 스케치라도 반듯하게 그려볼 양으로 앞에 나섰다. 함석헌을 통해서 자기 사상을 구축하려하기보다는 그가 남긴 가르침의 핵심을 가능한 한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왜 지금 하필 함석헌을 이야기하려하는가?
안팎으로 세상이 혼란스럽다. 나라와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지금 당장에도 세계를 지배해온 미국중심의 시장경제 금융 질서가 붕괴되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경제만이 아니다. 뒤틀리지 않은 분야가 없다. 사회와 문명의 근본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전체적인 처방이나 비전을 말해줄 ‘나라의 어른’이 없다. 쳐다보고 지혜를 구할만한 스승, 구루나 시대정신을 밝혀줄 ‘위대한 혼’이 없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위기의 장본인이 된 마당에 민주적 절차를 탓할 수도 없는 난국에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정치가나 언론에 해법을 기댈 수도 없다. 문제를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해야할 종교계나 교육계도 온통 물질주의와 시장경제에 함몰되어 있다. 온통 부패해져서 미쳐 돌아가고 있다. 함석헌이 말한 대로 뒤집어엎어야 할 대상들이다.

이럴 때 가장 그리운 것이 함석헌 같은 위인이다.
그는 남다른 통찰력으로 우리 사회와 역사를 관찰하고 갈 길을 제시했다. 그가 20세기 중후반에 제시한 의제와 이상들은 아직도 타당하고, 더욱 더 유효하다. 실현되지 못한 것이 태반이다. 그는 위기의 일차적 책임이 정치와 언론에 있음을 혀가 닳도록 강조했다.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져 이들의 행태가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민주화에 공짜로 편승하여 더 교묘하게 국민의 정신과 의식을 좀먹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물질보다 정신이다. 물질만능과 탐욕의 늪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정신이요 혼이다. 이것을 살려내야 인류가 한 생명으로 다음 진화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그것이 함석헌이 던진 메시지이다. 함석헌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 “오늘 세계의 어지러움은 결국 정치의 어지러움이다. 그 원인은 정치가 인간이 뭣인지를 모르고 무시하면서, 세상을 이끌고 가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은 세상을 가만두지 않고 들볶는 데 있다. 명령 위에 또 명령, 계획 위에 또 계획, 연극 위에 또 연극을 꾸며 민중이 잠깐을 가만있을 수 없이 들볶는다.... 정치가는 끄트머리만을 보고 말로만 공적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다. 2천년 전에 장자가 한마디로 ‘너는 말쟁이 놈’이라고 꾸짖은 것은 참 통쾌한 일이다. 민중에게 말을 주고 그 생명의 실속을 도둑질해먹는 것이 정치다.” ( <‘씨알'의 옛글풀이>)

오늘에도 참 통쾌하게 들리는 소리가 아닌가. 밑바닥 민중을 대변하는 ‘씨알의 소리’이다. 그래서 오늘의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의 말씀과 사상을 반추할 필요가 있다. 주제는 하찮은 ‘정치’에서부터 신비한 ‘새 인류’까지 다양하고 폭넓다. 이 소리는 다만 맛보기일 뿐이다. 앞으로 독자는 여러 날 동안 함석헌이 남긴 웅혼하고 가슴 트이게 하는 말씀의 바다로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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