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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수우 시인 칼럼

입의 문화, 말의 심연

by anarchopists 2019. 12. 1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9/1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입의 문화, 말의 심연

바다 위에 떨어진 햇살은 물결을 황금바늘처럼 세운다. 빛살의 파편들은 끊임없이 해안으로 우주의 신비를 실어나른다. 그 물비늘은 삶을 설레게 한다. 허나 우리는 그 아래 얼마나 깊은 심연이 있는지 아는 걸까. 그 반짝임은 심연에서 걸어나온 파문과 진동이다. 심연은 얼마나 먼 데서 얼마나 먼 시간을 흘러온 것일까. 바다 앞에 서면 몸속으로 밀려오는 어떤 아득함과 비의에 숨이 멎곤 한다. 한 마리 고등어만큼도 그 심연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일상도 그렇다. 우리가 누리는 삶의 표면, 그 순간순간은 실지 영혼의 거대한 심연에서 비롯된다. 세태가 워낙 거칠어서 우리는 진정한 삶의 근원을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심연을 잃어버린 시대를 산다. 심연이 없이도 어디든 흘러갈 수 있다고 함부로 믿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입은 우리 심연의 출구이다. 말은 영혼의 심연에서 길어올리는 물비늘이며, 언어현실은 심연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여 말의 현장은 시대를 들여다보는 현미경이 된다. 가는 데마다 함부로 된 말들, 거친 말들, 거짓의 말들, 매끄러운 말들이 난무한다. 표피적이며 속도적인 목소리들이 사방에 넘치지만, 거기엔 진실도 진실에 대한 의지도 없다. 어떤 다양함을 내세워도 이는 소통이 되지 못하고, 사회는 우울하다.

"말씨란 말이 있지만 말이야말로 씨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것의 결과인 동시에 장차 올 것의 원인이다. 말씀은 현재요, 현재는 말씀하는 뜻이다. 그것은 뵈지 않는 것과 뵈는 것 중간에 선다. 그것은 정신인 동시에 물질이다. 심판인 동시에 구원이다. 그것은 역사인 동시에 계시다. 말을 입으로 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입은 한 입으로, 들어가기는 물질이 들어가서 나오기는 정신이 나온다. 죽음도 거기 있고 삶도 거기 있다."
(함석헌전집『인간혁명』p.16-17)

이처럼 함석헌 선생님은 이미 언어의 근원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물질이 들어가지만 정신이 나오는 입.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심연이 있다는 건 결국 인간은 영성적인 존재라는 말과 같다. 입은 정신이 나오는 곳인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걸 보면 말은 곧 생명이고 숨결이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는 입으로 전해졌다. 따뜻한 목소리들로 전해져온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들, 인류는 말을 통한 상상력으로 문명을 건설해온 것이다.

옛말에 천사와 악마의 차이는 그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있다고 하였다. 입술의 언어가 우리를 괴물이 되게 하거나 인간이 되게 한다. 한 마디로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은 입술의 언어에 있다. 모든 말은 현재성을 가지고 우리를 표현한다. 입과 입속의 말은 그만큼 모든 삶과 정신의 척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에서 혀는 가장 길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었고, 선지자들도 입에 파숫꾼을 세워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현대인들은 맛집 기행에 여념이 없다. 이른바 미각의 시대이다. 모든 매체는 미각을 찾아나서고 사람들은 점점 더 미각의 쾌락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 맛을 섭취한 후, 입에서 나오는 건 정신이 아니라 기어(綺語)와 기어(旗魚)들이다. 정치와 경제판에서 종교와 교육판에서 밀실에서 광장에서 무수한 말들이, 무수한 소문들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절망스럽게 한다. 끊임없이 심판하는 말들이 오고간다. 말이 넘친다. 그리고 우리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신뢰를 잃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돈만, 보험만 신뢰하게 되었을까. 기어(綺語)들이 만연한 까닭이다. 오늘날의 말은 매끌매끌하고 번지르르하다. (그중 하나가 광고이다.) 그리고 무수한 소문과 험담 속에서 함부로 번성되는 분노와 폭력들. 특히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말하는 자, 험담의 대상자, 그리고 듣는 자이다. 그만큼 말은 위험하다. 어떤 칼보다도 위험하고 어떤 방사능보다도 위험하다. 영혼을 죽이기 때문이다. 삶도 죽음도 거기 있음이다.

이러한 소통의 불능과 불신은 무관심으로 전개된다. 지하철 안이나 열차 안에서 보면 모두들 손바닥 안에 휴대폰에 몰입해 있다. 바깥 풍경이나 주변에는 별 관심이 없이 모두 작은 창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신인류라는 표현이 그대로 절감된다. 끊임없이 검색과 삭제를 클릭하는 눈빛과 손끝만이 자기를 찾아가는 방법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 어찌 선택과 실천이 따라가지 않는다고 할까만 말의 심연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닐까 두렵다.

입은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삶을 함정으로 만들기도 하고 존재의 심연으로 만들기도 한다. 심연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말의 질서를 이룬다. 소리없이 흐르는 그 도도한 흐름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거기엔 아름다운 공존이 존재한다. 공존은 말의 현장을 기반으로 한다. 문화란 결국 전체를 전제로, 그리고 전체의 말을 통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말은 미래를 바꾸는 힘이다. 하여 모든 희망의 근원이기도 하다.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말투와 어조에 따라 한 사람의 심연을 읽어내듯, 전체의 언어현실을 통해 공존하는 사회를 읽어내고 또 추구할 수 있다.

입이 만드는 문화가 맛집기행뿐이어서야 하겠는가. 진실의 입, 입의 약속을 통해 말의 심연을 키워나갈 때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공존하는 법을 익혀내지 않겠는가. 말은 감정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행동을 만들어낸다. 무릇 시대를 걱정하는 자, 미래를 꿈꾸는 시민이라면 입의 문화에 좀더 고뇌해야 하리라. 지성의 입술은 어떤 빛깔일까.
말은 소비의 방식에서 사랑의 방식으로 흐를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말의 진정한 심연을 찾아갈 수 있을까.
김수우 시인님은
시인이다. 1959년생 부산출신(본명 김경복).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시와 시학>으로 등단하였다(1995) 그는 ‘인문학적 실천’을 온몸으로 밀고 가는 저력을 가진 여성이다. 부산지역에서 ‘지역 인문학 운동’을 정말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백년어서원> 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부산지역 인문학 연구와 발전에 힘을 싣기 위해 <신생인문학연구소>의 성과확산실장도 맡고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길의 길>, <당이의 옹이에 옷을 걸다>, <붉은 사하라>(2005), <젯밥과 화분>(2011) 그리고 사진에세이집으로는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 밑 푸른 바다>, <아름다운 자연, 가족>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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