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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수우 시인 칼럼

인문의 실천은, 용기 있는 저항이다.

by anarchopists 2019. 11.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2/14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우린 실패를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떤 열악한 구조에서도 생명이 지닌 가능성을 찾아내는 제3의 눈동자, 그것이 바로 인문이며 동시에 공감의 능력이다. 공감이 미래의 은빛 열쇠인 건 분명하다. 무한경쟁이 낯선 추상화로 만들고 말지만 공감은 제비꽃이나 은행나무처럼 자연적 질서에 감응한다. 이러한 공감의 실천은 영적 차원의 에너지에서 나온다.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확신이 있을 때 영감과 계시를 세계를 향상시키는 원천으로 확보할 수 있음이다. 인문학은 인간에게 기억을 되돌려주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근원에 관한 통찰은 자본의 무한질주를 뛰어넘는 예지력으로 작용한다. 만연한 상대적 빈곤과 비굴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청빈과 겸허는 삶의 신성성을 회복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동은 도무지 감지되기 어려운 현실이다. 끝없는 자본의 소용돌이 속에 잠식된 몸뚱이들만 아슬아슬하다.

삶은 끊임없이 실패를 성공하는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실패를 성공한다는 말은 미완성이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라는 논리와 통한다
. 이는 곧 삶은 과정이라는 진리, 완성은 항상 이행의 선 위에 있음을 이르는 것이리라. 어떻게 실패를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말 자체가 어쩌면 가장 저항적이며 동시에 인문의 상상력이 아닐까. 실패란 인간의 욕망과는 어긋난 방향이다. 인문학적 실천으로 실패하는 법을 언급하는 건 그 자체로 저항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은 동학에서 말하는 ‘불연기연’의 세계에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 불연기연은 숨은 질서를 칡덩굴처럼 따라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 부정을 통한 대긍정의 경계, 그 ‘불연기연’편이『동경대전』에서 ‘앎’과 ‘수행’에 대한 글에 이어져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유념할 만하다.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면서 함께 쓰이는 사유를 계속 이어가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닿지 아닐까. ‘앎’과 ‘무지(無知)’, ‘그러함’과 ‘그렇지 않음’, ‘성공’과 ‘실패’가 뒤섞이면서 혼란스러운듯 제시되지만, 그를 통해 불연과 기연의 틈새는 조심스레 좁아지고 있다. 이 불연기연의 틈새로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인문의 숨은 질서이며 곧 실패를 완성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 틈새로 우연(偶然)과 필연(必然)이 작동하듯이 말이다.

일 년에 책 몇 권 읽어내지 못하면서 인문학 강의에 몰려다니는 현상, 지식의 소비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대결해야 할 시대의 양상은 무엇인가, 고민이 커진다. 오히려 더 많은 한계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인문 풍경을 성찰하는 동안 우리 문화가 얼마나 소비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다문화, 통섭, 공감이란 말이 여기저기서 튀면서 인문학이란 말도 덩달아 악세사리처럼 딸랑거리고 있다. 지금의 인문학은 화장발이다. 오늘도 성형수술 중인지 모른다. 자본에 의해 길들여진 인문학인 것이다. 건강한 피부는 내면에서 이미 빛나는 윤기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려면 우선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속도주의와 편리주의와 성과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문제, 실존의 방식을 묻는 문제는 편리와 성과로는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계주의 현실은 성과로 가득하다. 그것이 대학에서 인문학이 죽어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을 지향한다는 것은 요구되는 성과와 싸우는 일이다. 여기서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이 나올 수밖에 없다. 로댕의 말대로 ‘진보는 느리고 불확실한’ 것이다. 더 불편하게, 더 천천히 가야 한다. 섬세하게 사물을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실존의 문제, 또는 타자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이란 물화된 지식이 아니라, 지배 관념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의식의 모험이다. 상황을 합리화하고 있는 왜곡된 신념체계에서 무엇을 반성할 것인가? 우리가 옳다고 하는 것과 참으로 옳은 것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안정된 개인을 욕망하게 만드는 인문학의 유행은 경계해야 한다. 시민을 관리 가능한 교양인으로 만들어 내듯이, 오히려 사회의 관행을 내면화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은 오히려 반(反)인문이다. 가치는 실천에서 향기를 낸다. 개념이 아니라, 체온으로 직접 부딪칠 때 인문학은 앎에서 삶으로 성장한다. 가치를 발견하는 데는 자긍심이 우선이다. 자신의 무늬를 환기하는 과정은 매우 소중하다. 세상의 어떤 명리도 자신의 자긍심 하나를 당할 수 없는 게 이치이다.

인문’. 미친 말 같은 소비사회에서 늙은 창녀가 저녁마다 그리는 입술처럼 쓸쓸하고 애잔하다. 그러나 이는 우리 영혼이 온힘으로 요청해온 가장 오래된 몸짓은 아닐까. 도무지 아름답지 않지만 존재론적으로 연민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문화변혁의 노력도 결국 경제 논리에 지고 만다.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일은 지루하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인문의 실천은 미세한 상상력과 불온한 저항을 필요로 한다. 불편할 용기가 있는가? 손해볼 용기가 있는가?

인문학은 앎이 아니라 삶이다. 사랑이 있는 사건의 인문학으로 나가야 한다
. 흘러 흘러서 바다로 가야하는 것이다. 그건 자연스러운 소명이면서 생명적이다. 문득 실화라는 도마뱀 이야기가 떠오른다. 도쿄에서 올림픽 개최를 위해 주경기장을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정부는 경기장 주변의 집들을 모두 구입, 그것들을 헐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다. 집을 허는 작업 도중 한 집의 지붕에서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도마뱀은 꼬리에 못이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었다. 집주인에게 확인해 보았지만 3년 동안 어떠한 수리나 공사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도마뱀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3년 동안이나 살아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 계속 관찰하게 되었다. 그러다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날라다 주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몸이 불편한 친구를 위해 3년 동안 그 집을 떠나지 않고 헌신을 한 것이다. 거기 무슨 성과가 있겠는가. 거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실패를 성공하는 법을 잘 보여준다. 성실함과 기다림과 신뢰, 꾸준히 3년 동안을 먹이를 물어다준 그 관계가 우리가 담지해야 할 인문학의 세계, 곧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배려와 환대의 기본조건이기에 말이다. 어떤 권력과 권위의 뒤편에서 열심히 살아낸 관절 불거진 손등이 곧 인문학이 아닐까. 이런 진실이 우주의 허공을 꿰뚫고 가는 광선처럼 앎과 삶을 가로질러야 한다. 인(人)은 없고 문(文)만 있는, 人도 文도 없고 학(學)만 있는 성과 중심의 인문은 결국 자본의 시녀뿐이다.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자리, 상상할 수 있는 자리, 거기서 새로운 사랑이 싹트리라 믿는다. 하나씩 지워야 할 물화의 선들. 그리고 하나씩 돌아오는 사람, 그리고 역사, 그리고 예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자긍심을 선물할 것인가.(2011. 12.14, 김수우)

김수우 시인님은
시인이다. 1959년생 부산출신(본명 김경복).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시와 시학>으로 등단하였다(1995) 그는 ‘인문학적 실천’을 온몸으로 밀고 가는 저력을 가진 여성이다. 부산지역에서 ‘지역 인문학 운동’을 정말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백년어서원> 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부산지역 인문학 연구와 발전에 힘을 싣기 위해 <신생인문학연구소>의 성과확산실장도 맡고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길의 길>, <당이의 옹이에 옷을 걸다>, <붉은 사하라>(2005), <젯밥과 화분>(2011) 그리고 사진에세이집으로는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 밑 푸른 바다>, <아름다운 자연, 가족>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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