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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수우 시인 칼럼

남을 끌어안을 때 나는 하나로 완성됩니다.

by anarchopists 2019. 12.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21 07:38]에 발행한 글입니다.


질문하다 답하다

꽃을 그리워하다

그대, 어디 계신가요. 삶이라는 긴 여행은 당신을 그리워하는 일,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문화도 교육도 종교도 소비재가 되어버린 물질사회에서 나는 너무나 그대가 그립습니다. 경제성장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자살율이 세계 1위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나는 두렵고 쓸쓸합니다.

인간의 지성이 출현한 이후 인간에게는 많은 경전들이 생겼습니다. 이 무한에 대한 물음들은 결국 당신을 그리워하는 방식이겠지요. 생명현상을 자각하면서, 또한 영혼의 실재를 감지하면서 사유를 진행시켜온 인간은 결국 무수한 형식을 만들고, 형식을 해석하는 무수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지혜들이 결국은 근원을 기억해내는 일에 불과합니다. 문명사를 건너오면서 잃어버린 그 자리, 그 근원의 숲에는 분열되지 않는, 분석할 필요가 없는 무수한 내가 하나의 얼굴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지가 되지 못한 모든 기억들을 회복하는 일이 바로 이 지구에 온 이유입니다. 체험된 과거이든 지식으로서의 과거이든 이 아름다운 타자를 찾아가는 일이 곧 나의 여행입니다.

Yama, 禁戒란 결국 타자의 존재방식에 관한 큰 질문과 실천에 해당합니다. 탐욕과 욕망, 집착 등으로 생긴 고통과 무지는 결국 타자에 대한 무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 어던 것이든 고통스럽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이것이 조화의 큰 공식입니다. 이 조화는 결국 가장 자연스러운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아힘사, 불살생, 비폭력 이는 보편적 진리 또는 윤리 이전의 자연적 세계입니다. 정직함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원형적인 힘입니다. 훔치지 않는 것, 물질적인 것이나 비물질적인 것이나 부당하게 자신의 몫으로 가지는 것은 조화를 깨뜨립니다. 말과 행동을 순결하게 한다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양식입니다. 이 금계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를 부탁하지 않았던가요. 꽃을 그리워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꽃을 보다

그냥 오래오래 깜깜했습니다. 하지만 봄빛을 타고 여기저기 꽃잎 터지는 소리가 온 천지에 번집니다. 씨앗이었던 그리움들은 매순간 떨립니다.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파문진 물결들로 온 우주가 떨립니다. 동시에 슬픔의 옷을 껴입고 있는 속삭임들, 우리 시대 불평과 신음들을 감지해낼 수 있나요.

본다는 것은 결국 존재에 대한 절실한 응시입니다.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눈동자처럼 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이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이라면 금계가 가진 의미는 곧 이의 실천일 뿐입니다. 이 실천은 어떤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꽃이 피듯 아름다운 에너지들의 바라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축가인 루이스 칸은 ‘우리의 새로운 시설은 단지 놀라움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지, 분석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꽃을 보는 힘은 경이로움입니다. 생명에 대한 놀라움이 서로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하는 방식이 타자를 있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꽃으로 피어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적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기적이라면 어떻게 설레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모든 고통과 무지는 탐욕과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합니다. 이는 설레임이 아니라 두려움과 억울함과 아픔으로 굳고 굳어버린 어떤 이물질의 덩어리처럼 불편합니다.

유한한 존재로서 사유하는 방식은 유쾌한 가치를 피워냅니다. 강물은 그냥 흘러가는 게 순리이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니까요. 물살을 만들어내는 투명한 지느러미를 우리는 꽃이라 부릅니다. 자연적이지 못한 인간의 모든 폭력, 욕망은 늘 우리를 목적에 잘 활용하고 늘 혼란하게 하지만 결국 꽃은 모든 자리에 피어납니다.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 광대한 우주 속에서 적막한 속도로 저 혼자 돌고 있었을 이 지구, 고생대부터 꽃들은 피기 시작했지요.
꽃을 보는 것은 진리에 대한 답입니다. 아름다운 영성에 대한 답입니다.

꽃이 되다

나는 그대에게 질문하고 그대는 나에게 답합니다. 그대는 나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꽃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씨방 속에 맺혀가는 씨앗을 느낍니다. 생명을 그리워하는 힘이 자신을 생명으로 만듭니다. 이 우주는 생명의 본성에 충실한 것들로 그득합니다.

내 얼굴을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사된 이미지를 거치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주변의 사람들이 더 잘 안다는 말입니다. 또 타자의 얼굴도 내가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꽃이 된다는 것은 내가 타자가 되는 힘입니다. 타자를 끌어안을 때 나라는 존재는 하나로 완성됩니다. 가족을 끌어안을 때, 사회를 끌어안을 때, 동물을 끌어안을 때, 바위를, 강을 끌어안을 때 우리는 완벽한 우주의 질서로 편입됩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 사랑이 시작되는 방식으로서의 이 모든 질서는 이 별을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수놓습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수많은 경전을 머리로 가져갈 것인지, 가슴 속으로 가져갈 것인지, 손으로 가져갈 것인지 우리는 고뇌해야 합니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무수한 지혜를 분석하지만 아마 꽃이 되는 방식은 아닐 듯합니다. 경전은 결코 우리를 가르치려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경전의 언어들은 마음 깊숙이 자리하도록 내버려두고 꿈을 꾸는 것, 경전을 이해하려 들기보다 그냥 깊이 느끼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기보다 그냥 침묵 속에 놓아두는 것이 나은 것처럼요.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그 경전의 언어를 손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오래된 상처처럼 딱지를 떼고 분홍 속살처럼 우리를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하기보다 우는 것이 더 나은 상처처럼 치유의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이제 수행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어야겠지요. 내가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원인이고자 합니다. 꽃이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내 역할, 우리의 역할입니다. (2011. 10.20, 김수우)

김수우 시인님은
시인이다. 1959년생 부산출신(본명 김경복).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시와 시학>으로 등단하였다(1995) 그는 ‘인문학적 실천’을 온몸으로 밀고 가는 저력을 가진 여성이다. 부산지역에서 ‘지역 인문학 운동’을 정말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백년어서원> 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부산지역 인문학 연구와 발전에 힘을 싣기 위해 <신생인문학연구소>의 성과확산실장도 맡고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길의 길>, <당이의 옹이에 옷을 걸다>, <붉은 사하라>(2005), <젯밥과 화분>(2011) 그리고 사진에세이집으로는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 밑 푸른 바다>, <아름다운 자연, 가족>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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