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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일요시론] 미래사회의 모습, 역사 속에서 배운다.

by anarchopists 2020. 1. 20.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04 07:38]에 발행한 글입니다.

미래사회 모습, 역사 속에서 배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사유재산을 보호할 자유가 있다. 이것이 천부인권이다. 많은 학자와 사람들은 이러한 천부인권을 지켜나갈 바람직한 사회구조에 대하여 끊임없이 논의해 왔다. 그 결과, 국가의 통치구조는 중앙집권적 관리시스템에서 지역관리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주의 담론이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미래사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의 해답을 찾아보기 위해 중국역사에서 일어났던 민중기의(民衆起義)를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이야기는 중국 송대(宋代)에서 시작된다. 송은 당말(唐末)의 혼란과 오대십국(五大十國)의 분열을 극복하고 건국하였다(960) 송은 이전의 왕조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구조를 달리했다. 수 세기 지속되어온 족벌적ㆍ특권적 문벌귀족을 소멸시켰다. 그렇지만 국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따라 관료 중심의 관직이 황제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군대(禁軍ㆍ廂軍) 또한 황제의 직속으로 편제시켰다. 이러한 관료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만만치 않게 소요되었다. 또 문신관료체제를 구축한 송 왕조는 외국세력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전쟁비용도 크게 증가하였다. 이는 곧바로 농민의 부세부담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송대의 역사적 배경 아래서 농민기의(農民起義)들이 일어난다. 종전에는 역사서들이 왕(王)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권력 위주로 써졌다. 이 때문에 농민들의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을 민란 또는 농민의 난(亂: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윗전에 대드는 逆賊의 의미) 등으로 기록하였다. 지배권력 중심의 역사인식이 무비판적으로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탓으로 공교육에서도 농민과 민중들의 저항을 난으로 배우고 있다. 그러나 이제 역사기록은 달라져야 한다. 역사를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게 아니다. 민중(원래 民衆은 人民으로 씀이 옳다, 그런데 인민이라는 단어가 북한에서 쓰는 단어라 하여 반공을 국시로 하던 시절, 인민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다)의 입장에서 보면 민란은 분명 지배층의 못된 짓에 대한 자유의 항거였다. 따라서 난의 의미가 아닌, ‘사회정의를 위한 자유의 항거’라는 의미로 기의(起義)라고 씀이 옳다. 그래서 여기서는 민중기의 또는 농민기의로 쓰기로 한다.

송대 민중기의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기의가 왕소파ㆍ이순(王小波ㆍ李順)이 이끄는 농민기의(993), 방랍(方臘)이 이끄는 농민기의(1120), 종상ㆍ양요(鍾相ㆍ楊幺)가 이끄는 민중기의(1130)가 있다. 이외 《수호전》에 나오는 양산박 송강(松江)의 민중기의 등이 있다. 송강기의를 제쳐두면,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전제군왕사회에 저항하면서 이상적인 사회체제(均貧富, 等貴賤)를 주장하고 있다. 정통 중국사서에서도 쓰촨성[四川]에서 일어났던 왕소파ㆍ이순이 이끄는 농민기의를 “균산반란”(均産反亂)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소파ㆍ이순의 이끄는 농민기의는 송 정부가 차(茶)를 전매하여 국가가 이익을 독점한 데 반대하여 일어났다. 왕소파와 이순은 모두 차 생산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 전매제의 시행은 이들에게 치명적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의 조치에 반대하여 기의를 이끌었다. 왕소파ㆍ이순의 기의는 농민들이 합세하면서 삽시간에 쓰촨지역을 휩쓸고 나갔다. 이것은 단순히 송 정부의 차 전매에 대한 불만뿐이 아니었다. 송 정권의 관료와 서리들의 가혹한 수탈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소파ㆍ이순의 기의군은 송 정권의 탄압으로 실패한다.(994) 그러나 왕소파ㆍ이순 기의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균산’(均産: 사유재산을 골고루 나누어 갖자)을 표방하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富’와 함께 ‘貧’을 인식했다. 즉 ‘가난’을 가져오게 한 원인으로서 ‘부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래서 ‘가난’에 속한 자들은 ‘가난’의 원인을 제공하는 ‘부자’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당시 대중에게 설득력을 주었다.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중저항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방납이 이끄는 민중기의다. 송나라는 문치주의 탓으로 군사력의 약화와 사회전반에 걸친 문약(文弱)을 가져왔다. 문약현상은 외국의 침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송의 병역제도는 당말 이래 모병제였다. 모병제에 따른 군사비지출 또한 막대하였다. 이것이 송대 재정압박의 주요 원인이 된다. 또 사회경제면에서도 장원제의 발달로 대토지사유화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자영농의 파산을 가져왔다. 그리고 인구증가에 따른 상업인구의 증가와 함께, 대상인의 증장(增長)도 있게 되었다. 이것은 중소상공업자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러한 국가적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송 신종(神宗, 1068~ 1086) 때,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 부국강병책)이 나온다. 왕안석의 신법은 중소농민과 상공업자를 보호하고 국가재정을 바로 잡으려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지주(地主)ㆍ대상(大商)ㆍ관료(官僚)들의 이익과는 배치되는 정책이었다. 이 결과 왕안석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당(개혁파)과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하는 구법당(수구보수파) 사이에 치열한 당쟁으로 연결된다.

이런 와중에서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哲宗)이 즉위한다. 그리고 수구파인 사마광이 등용된다. 이 결과 왕안석의 부국강병책은 폐기되고, 부패관료들의 독제적 권력은 사회적 부패로 이어졌다. 권력층의 부패는 과중한 세금징수, 빈번한 노동징발로이어졌다. 이 탓으로, 산동의 송강(松江), 강남의 머슴 출신 방납이 이끄는 민중기의가 일어난다(휘종, 1120). 송강 기의군은 비겁하게도 중앙정부에 항복한다. 그러나 방납기의군은 1백만 명으로 불어난다. 이들 기의군은 부호(富豪)나 악덕관리만 공격했다. 그러나 1년여만에 실패를 하고 만다. 방납기의군의 역사적 의의 또한, 가난의 원인으로 부자와 악덕관리를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세 번째 민중기의는 이렇다. 여진이 세운의 금의 공격으로 북송은 멸망하고 왕족들은 남경(應天府)에다 남송정권을 연다.(1127) 북송의 멸망, 남송의 건국이라는 사회적 혼란은 민중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력자의 사병집단은 농민들을 마음대로 약탈했다. 지방호족들의 대토지사유화는 자영농의 몰락과 함께 빈민층에 대한 압박을 가열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농민들로 하여금 어떠한 형태로든 단결해서 권력과 강자들의 약탈과 수탈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호남(湖南 洞庭湖)에서 일어난 종상ㆍ양요가 이끈 농민기의다.(1130~1135) 종상은 관료ㆍ부호ㆍ유학자ㆍ승려들을 천(賤)의 적(賊)인 귀(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등귀천’(等貴賤: 귀족과 백성을 평등하게 하자)을 기의군의 이념으로 삼았다.

이렇듯 역대 중국의 봉건왕조들은 국가라는 울타리를 치고 피지배층인 인민(百姓)에 대한 경제적ㆍ사회적 자유를 유린하고 하였다. 그러나 서슬이 퍼런 억압정치 속에서도 사회적 자유를 얻고자 하던 민중들은 정의를 향해 앞으로 나갔다. 이들 민중기의군은 지배층(왕족과 귀족)에 저항하여 ‘등귀천’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불공평한 국가이익의 독점에 대한 공정한 분배, 곧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민중기의도 있었다. 이들은 가난의 원인으로 부자를 인식하고 ‘균빈부’(균산)를 주장하였다. 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자유주의와 공리주의가 이에서 파생하였다. 자유주의는 시장경제를, 공리주의는 복지국가를 지향가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 후진 국가에서는 아직도 중앙관리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다. 그리고 로컬리티로 가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에 대한 반성을 촉구해본다. (2010. 4.2, 취래원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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