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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강좌

분노하는 민중(씨알)과 함석헌 효과

by anarchopists 2019. 10. 2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5/06/16 06:02]에 발행한 글입니다.

분노하는 민중(씨ㅇㄹ)과 함석헌 효과


함석헌. 우리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아련하게 기억한다. 한국 역사의 현대사적 인물로서 철학,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기술, 교육, 여성 등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독특한 씨ㅇㄹ철학을 우려냈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비해 더 이상 그를 이 시대에 다시 만나야 할 사상가로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슬픈 일이다. 서구 철학자의 세례를 받고 지난 반세기를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자양분을 그들로부터 찾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구의 사상이나 철학조차도 외면당하고 있다. 이성적 숙고를 통해서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이성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닌 물질적, 과학기술적 진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보다 그것을 향유하려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식과 진리, 그리고 지혜에 대한 욕구보다 물질적이고 향락적 욕망이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 현존재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것처럼, “자기 창조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인지, “자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실존”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다시 요청되는 까닭이다. 인간 현존재는 결단코 일상인(das Man)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근본기분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고루하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고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수행적 언어들이 넘쳐난다. 함석헌의 저서를 읽으라는 주문은 한가한 잡담으로 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할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민중의 의식을 깨우는 함석헌의 언어, 그리고 언어적 행위들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그의 발언적 진리를 인식하기에 앞서, 민중은 지금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중이 전체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민중이 아니라 그것은 노예요 종이다. 현재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본과 체제, 이데올로기와 상품의 노예는 있을지언정 순수 의식, 순수 정신을 품은 민중을 만나보기란 매우 어렵다. 30년 전 함석헌은, “사람은 감응(感應)하는 물건이다. 감응이란 곧 다른 것 아니요, 하나로 된 바탈[보편성, 통일성]이다. 사람이 전체와 내가 하나인 것을 느낄 때처럼, 전체가 이 나를 향해 부르는 것을 느낄 때처럼, 흥분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감응하면서 흥분하는 현존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전체를 지각하고 깨닫는 사람이 부족하다. 게다가 흥분이란 대상에 의해서 감각된 인간의 감정이 촉발되는 것일 텐데, 이성적인 것과 반대되는 부정적 태도와 반응인가. 아니다. 흥분은 민중이 살아 있다는 인식과 기분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한 인간의 근본기분은 지루함이나 권태, 불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흥분이야말로 민중이 혁명을 할 수 있는 근본기분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상상으로는 혁명기분은 아니 나온다... 혁명은 혁명으로만 나온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미지(image)는 감정과 인식을 속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작용 없이 상상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상상(Einbildung)은 대상을 현시함이 없이 상(Bild)을 떠올리거나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상을 그리는 것만으로 혁명을 할 수 없다. 자칫 상상이 지나치면 망상이나 공상이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분, 혁명을 일으키게 만드는 흥분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감정이어야만 한다.


혁명은 전체에 대한 인식과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혁명이 무슨 치기어린 감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직관과 판단은 사태에 대해서 저항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획득한다. 지금 민중이 혁명의 근본기분인 흥분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흥분의 물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트인다. 흥분의 의지, 흥분의 에너지가 매스미디어, 스포츠, 쇼핑 등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의 흥분에의 의지는 전체, 즉 체제, 제도, 조직, 이데올로기, 자본 등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민중의 흥분의 의지는 조작되고 통제당하면서 그 흥분이라는 근본기분마저도 박탈당하고 있다. 혁명에의 근본기분이 흥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기분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촉발되고 있지 못하니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민중이 혁명을 하려면 혁명기분을 새롭게 일구어야 한다. 혁명기분이 인간 현존재의 변화와 세계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민중은 노(怒)해야 한다. 분노(憤怒)의 근본기분은 “생명이 프로테스트다.” “생명은 스스로 폭발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민중이라면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체제, 제도, 조직, 지배, 자본 등에 대해서 거부하고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민중의 노함이다. 노함, 분노가 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 흥분의 근본기분은 민중의 분노의 감정으로 승화되면서 역사를 바꾼다. 함석헌의 주장처럼, “민중이 노하지 않고 역사가 나간 일은 한 번도 없다.” 역사를 바로 세우고 삶을 살아 있게 만들며 민중을 위한 세계가 되도록 하려면 민중의 분노 감정, 민중의 근본기분을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현실에 안주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것은 혁명기분, 즉 분노의 근본기분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분노의 감정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중의 분노기분이 먹을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민중의 분노기분은 옳음[義]을 위해서 일어나야 한다. 민중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생래적으로 그것의 옳음을 추구하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의 근본기분은 정의, 의로움에 대해서 흥분할 때 발생한다. 정신을 가다듬고 혼으로 혁명을 해야 한다. 정신으로, 혼으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비폭력으로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근본사태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인식하려는 태도의 변화가 없다면 아마도 혁명기분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Wie)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다만 의로움을 위한 근본기분을 혁명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실존적 결단이 문제가 된다. 오늘날 민중은 자유를 갈망하는 다중(multitudo)으로 등장하면서 과거의 민중과는 다른 열망과 욕구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통일된 분노의 감정을 결집하기가 어렵다. 공통된 목적과 만족이 아니라 개별화된 이익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 되는 바탈, 즉 보편성과 통일성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민중은 흥분의 근본기분과 분노의 근본기분으로 혁명에의 의지를 고취시켜야 한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민중의 정신을 끈질기게 기투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체제는 폭력을 휘두르지만, 민중은 비폭력으로 세계의 진리를 밝히려고 한다면 자신의 은폐성의 비은폐성뿐만 아니라 세계의 은폐성의 비은폐성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정신이라는 대원칙은 비폭력에 기반을 둔다. 민중은 감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정신적 존재다. 물질로 회유하려는 체제에 대해서 생명만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외치는 민중은 저항을 통해서 인간 현존재의 삶의 고유한 방식을 고고하게 고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은 철학함이고,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함석헌의 호명은 진리 발현을 통하여 해방하는 효과, 자유롭게 하는 효과와 더불어 자신의 삶의 기반확보, 즉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하는 입장을 갖게 한다.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를 한갓 낡은 사상가나 철학자로 치부해서는 안 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글쓴이_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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