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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병상 박사 환경칼럼

물 흐르듯 흐리지 못하는 물 이야기 3

by anarchopists 2019. 12.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1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물 흐르듯 흐리지 못하는 물 이야기
3.
빗물이 후드득 산기슭에 떨어지면 마른 낙엽 사이로 스며들어 곰팡이나 세균들이 번식하고, 빗물이 늘어나 두터운 낙엽과 부엽토가 흥건해지면 조금씩 땅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맥을 형성한다.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버드나무 옆 마을 우물은 뼈 속까지 시원한 물을 사시사철 보장해주었다. 그런데, 버드나무는 왜 꼭 우물가에 있을까. 누가 심었기 때문이 아니다. 물기가 많은 땅을 좋아하는 습성을 잘 아는 조상이 버드나무 옆에 우물을 판 게고, 나그네가 물 한 사발 청했을 때 아낙은 버드나무 한 잎을 사발에 띄워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낙엽 사이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이면 작은 실개천을 만든다. 1977년이었나. 당시 대학생이던 건장한 청년 여섯 명은 보름 치 부식을 짊어지고 설악산 기슭을 헤맸다. 대청봉에서 화채봉으로 발길을 돌려 없는 길을 무모하게 헤치다 그만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서너 시간 산 속을 헤매다 “찾았다!” 외친 친구는 물길을 찾았다는 거였고, 목마르면 고개 숙이며 긴장 속에 첨벙이길 이틀 만에 마을 뒷길을 발견했다. 작은 나뭇가지가 모여 굵은 가지를 만들고 굵은 가지가 하나의 줄기로 모이듯, 산 속의 작은 계류들은 모이고 또 모여 하천을 만들고, 그 하천은 큰 강을 이루는데, 26년 전 젊었던 우리는 강의 시원을 시원하게 만끽한 것일까.

1993년,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주민들은 생계를 무릅쓰고 거리에 쏟아져 나와야 했다. 소양강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고원에 군사종합군련장을 건설한다는 국방부의 통보에 저항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외출 중인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해 먹고사는 주민들은 그 날부터 파리를 날려야 했다. 인근 부대장은 외출외박 금지는 물론, 민간인의 가게에 들어가면 영창에 보내겠다는 야박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소양강 다목적 댐에 의해 대대로 물려받은 터전이 수몰된 인제군 주민들은 소양강의 발원지 1억 평마저 육해공군의 합동 군사훈련장으로 빼앗길 수 없다는 결의로 가득 찼는데, 수려한 원시 생태계를 밀어낸 군사종합훈련장은 결국 건설되었다. 애초보다 규모를 대폭 줄인 면적으로.

1997년, 이번에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내린천 주민들이 머리와 어깨에 구호가 적힌 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왔다. 소양강 보조 댐으로 내린천을 막겠다는 정부 발표에 분노했던 것이다. 소양강 다목적 댐에 이은 군사종합훈련장으로 막대한 터전을 잃은 주민이 아니던가. “이젠 내린천마저 빼앗으려고?” 환경단체와 손잡고 보전운동에 돌입한 주민들의 노력은 다행스럽게 헛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특산 담수어류가 풍부하게 분포하는 300리 내린천은 아직 유유하다. 하지만 주민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수도권 식수용 댐으로 내린천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흉흉하기 때문이다.

행정 수도를 충청권으로 옮기면 수도권의 주택 부족 현상은 완화될 터, 따라서 식수용 댐 소문은 삭으러들 것인가. 아직 속단하기 이르다. 행정수도가 옮겨가는 대신 ‘공장 총량제’를 풀겠다는 당국자의 발언이 언론에 비중 있게 실리지 않았나. 아파트보다 물 소비량이 많은 공장이 수도권에 몰려든다면? 래프팅 명소로 알려진 내린천의 운명도 멸종 위기에 처한 내린천의 황쏘가리처럼 위태로워질까 겁난다.

“뭐? 그깟 내린천?” 어떤 재벌은 내린천 따위에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내린천 댐 문제로 삭발한 인제군 주민들이 상경시위를 감행하기 몇 년 전, 그러니까 아이엠에프 경제 신탁통치가 시행되기 얼마 전, 모 재벌은 설악산의 맑은 물을 서울로 공급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발표한 적 있다. 설악산 생수가 부자들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낙차를 이용하여 생수관로를 서울까지 매설하겠다는 기막힌 계획이다. 영겁의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부엽토를 거쳤으므로 맑게 정화된 설악산 계곡 물은 수려한 산세와 어우러져 찾는 이의 뇌리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고, 옆새우 강도래 반딧불이 버들치 꼬리치레도롱뇽이 아직까지 건강했던 것인데, 설악산의 산삼 우러난 물까지 독차지하려는 자본의 발상에 실소를 넘어 몹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발상은 과거의 코미디로 넘어가고 싶지만, 아직도 유효한 곳이 있다. 부산 시민을 위한 식수용 댐으로 지리산을 틀어막겠다는 발상이 뿅망치 맞고도 여전히 고개 내미는 게임기의 두더지처럼 끈질기게 대두되는 것이다. 언제는 민족의 영산이라고 추켜세우더니, 이제 식수용이라고? 어머니와 같이 너른 지리산의 품은 수돗물 저장소로 버림받아야 하는 것인가. 부산시민의 수돗물이 오염된 책임을 왜 지리산이 떠맡아야 하나. 섬유산업이 사양이라 대구 경제가 침체된 오늘의 사태는 낙동강 한 구비를 공단으로 메우는 정치공작으로 이어졌고, 인구가 더 많은 부산시에서 수돗물 위기로 발끈하자 부랴부랴 만든 정부의 대책이 고작 지리산 식수용 댐이란 말인가! 지리산생명연대 회원들은 내린천 지역 주민의 분노를 공유하게 되었다.

1994년, 강원도 영월군 주민들은 인제군 기린면 주민들보다 먼저 서울로 삭발 시위를 나서야 했다. 강원도 원주시에서 흘러나오는 주천강과 강원도 평창군에서 흘러내리는 평창강이 영월군 서면 옹정리 조야에서 합수하여 서강으로 흐르다 영월읍 하송리에서 정선군에서 내려온 동강과 만나 남한강이 되어 충주호로 흘러 들어가는데, 하필 그 서강에 충청북도 제천시는 취수정을 파려했고, 당시 국무총리가 제천시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상수원으로 충주호가 더 가까운 제천시는 서강이 잠시 스치는 제천시 영역에 결국 취수정을 만들었고 인구 100만 시대를 꿈꾸고 있다. 동강댐으로 전국이 들썩거리기 전, 서강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취수정이 가동되는 순간 말라버릴 서강에서 오랜 역사를 같이했던 천연기념물 어름치를 포함한 28종의 담수어류는 멸종될지 모른다. 단종 애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청령포의 웅장함도 은둔하는 수달 가족과 함께 운명을 마감할 것이다.(2011. 7.31, 박병상)


박병상 선생님은
박병상 선생님은
생물학박사. 근본생태주의 입장에서 도시와 생태계 문제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다. 대학에서 ‘환경과 인간’을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생태주의 시각을 지닌 환경활동가를 키우고 싶어 한다.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대표로 활동했고 ‘전태일을 기리는 사이버 노동대학’ 부설 문화교육원 원장과 <인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굴뚝새 한 마리가 GNP에 미치는 영향》(1999, 다인아트), 《파우스트의 선택》(2000, 녹색출판사),《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2008, 책세상),《생태학자 박병상의 우리 동물 이야기》(2002, 복갤럽),《참여로 여는 생태공동체》(2003, 아르케),《녹색의 상상력》(2006, 달팽이),《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2007, 알마)등이 있다. 또한,《녹색평론》과 《환경과 생명》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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