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박병상 박사 환경칼럼

물 흐르듯 흐르지 못하는 물 이야기 2

by anarchopists 2019. 12.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8/09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박병상박사의 환경이야기 '물'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물 흐르듯 흐르지 못하는 물 이야기

2.
뜨거웠던 초기 지구를 상상해보자. 불덩어리 같은 지구가 식으며 지각이 굳기 시작할 때, 화산․지진․운석충돌들로 인해 끓어오르는 지구 속살이 지각 밖으로 쉼 없이 분출되었을 당시를 상상해보자. 다 끓인 묵을 가스레인지에서 꺼내면 굳기 전까지 뜨거운 수증기를 연실 밖으로 내놓고는 표면에 얇은 물기를 남긴다. 아직도 지각이 완벽하게 굳지
못해 이따금 발생하는 지진과 화산 폭발이 세계 언론을 장식하곤 하지만, 당시 지구는 그 빈도가 매우 심했을 것이다. 화산이 폭발할 때마다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분출되었다 우주로 사라지거나 중력이 끌려 뜨거운 표면에 내려왔다가 다시 끓어오르기를 반복하며 지구의 표면은 서서히 식어갔고, 지각에는 원시대양이 얇지만 넓게 고이게 되었을 것이다.

강력하게 쏟아지는 자외선과 더불어 화산과 지진이 반복되면서 원시대기와 대양에 포함된 물질들은 수많은 유기물을 만들어냈고, 대양에 녹아든 유기물들은 우연과 필연이 복잡다단하게 얽힌 여차저차한 과정을 통해 초기 생명체로 진화하게 되었을 것이다. 계속되는 지진과 화산은 대륙과 대양을 확실하게 갈라놓고 높고 낮은 지형을 구성했으며 끓어오르거나 증발한 수증기는 지구 공전과 자전의 영향을 받아 곳곳에 규칙적인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로서 크고 작은 하천이 지각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원시대양에서 진화한 초기 생명체들은 환경과 어우러지는 험난한 도태와 적응 과정을 거치며 종분화를 거듭했다. 탄소동화작용이 가능한 식물의 출현 이후 산소가 대기층에 쏟아져 나오면서 압도적이던 원시대기의 이산화탄소가 질소와 산소로 바뀌고, 성층권으로 올라간 산소가 오존층을 형성하자 쏟아져 들어오던 자외선이 대부분 차단되었으며, 자외선이 차단된 육상으로 생명들이 비로소 급속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과 온갖 버섯들, 눈에 보이는 이끼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환경 조건에 따라 산․강․들․바다․호수와 같은 지표면을 독특하게 뒤덮으며 개성 있는 생태계를 구성하고, 크고 작은 동물들 역시 생태계의 특성에 잘 적응된 모습으로 지표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이후 38억 년 동안 대략 30억 종의 생물종들이 진화와 멸종을 거듭했고, 현 지구 생태계에는 3,000만 종의 생물종들이 독특한 생태계를 구성하며 어우러져 있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사람은 가장 최근 생물종 진화의 막차를 타고 지구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때가 언제쯤일까. 직립보행을 기준으로 여기는 고생물학자는 삼사백만 년 전이라 강조하지만 문화를 기준으로 고집하는 문화인류학자는 10만 년 이전까지 거슬러 가길 거부한다. 화석의 대뇌의 용량을 기준으로 하려는 진화학자는 대략 그 중간 정도인 100만 년을 선호한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물속에 자신의 2세를 잉태시킨다. 씨앗이나 포자를 내놓은 식물이나 미생물도 물이 없으면 발아하지 못한다. 물속에 산란하는 물고기나 개구리는 물론이지만 사막에 알을 낳는 뱀 종류와 마찬가지로 나무 위에 둥지를 치는 새들의 수정란도 액체 상태인 알 속 난황에 떠있다. 사람을 포함한 포유류의 자궁 속 배아도 양막 안의 양수에 둘러싸여 떠있는 것이다. 이렇듯 물에서 생명을 얻어 태어나는 지구의 모든 생명들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

수렵채취 시절 이후 촌락을 형성하며 물로 밥해 먹던 우리 조상을 생각해보자. 북풍한설을 잘 막아줄 산을 뒤에 두고 오순도순 집을 지은 조상은 마을 뒷산을 진산이라 했다. 진산은 북풍한설만 막아주는 게 아니었다. 산나물과 약초 그리고 재목과 산짐승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조상이 영면할 장소를 제공했고, 무엇보다 맑은 물을 마을로 흘려
보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대개 산을 등진 양지 바른 마을 앞에는 시내가 흘렸다.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다. 물고기가 넘치는 시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단백질원을 무한히 제공해주었지만 농사를 허락해주었다. 시내보다 낮은 땅은 논농사를, 시내와 마을 사이는 밭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며 아마 안빈낙도했을 것이다.

골짜기 양지마다 모여 앉은 마을의 집에서 모락모락 저녁밥 해먹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치악산 구룡사를 향해 구불구불 오르는 완행버스의 차창으로 보았던 골짜기 너머 마을들, 인체에 비유한다면 집 한 채가 세포이고 마을들은 마치 세포조직 같았다. 집집으로 이어진 골목이 실핏줄이라면 마을 앞길은 혈관이겠지. 조직이 모여 기관을 형성하고 기관은 비슷한 일을 나누는 기관계로, 기관계가 모이면 신체가 구성되듯, 마을은 모여 작은 고을을 형성하고 고을은 모여 현으로, 현은 도로, 도가 모여 국가를 구성한다. 기관과 기관계의 구조와 기능이 다르듯, 마을은 마을대로 고을에 내다 팔 특산물을 달리하고, 고을과 현은 주변 환경에 따라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했을 것이다.

돌다리와 섭다리를 건너 고샅길 넘으면 만나는 마을길은 대체로 시내와 나란히 한다. 어디 마을길뿐이랴. 고을과 현을 연결해주는 큰길도 강줄기를 따랐고, 큰 강을 경계로 현이나 도가 나누어졌다.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은 힘을 바탕으로 하는 동편재, 서쪽은 기교가 중요한 서편재가 나뉘고, 하동은 경상도 이웃 구례는 전라도 사투리로 나뉘다, 화개장터에서 반갑게 만나곤 한다. 이렇듯 농경사회에서 물은 우리의 생명은 물론 다채로운 역사와 문화를 구성해왔을 것이다. (2011. 7.31, 박병상)

박병상 선생님은
박병상 선생님은
생물학박사. 근본생태주의 입장에서 도시와 생태계 문제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다. 대학에서 ‘환경과 인간’을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생태주의 시각을 지닌 환경활동가를 키우고 싶어 한다.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대표로 활동했고 ‘전태일을 기리는 사이버 노동대학’ 부설 문화교육원 원장과 <인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굴뚝새 한 마리가 GNP에 미치는 영향》(1999, 다인아트), 《파우스트의 선택》(2000, 녹색출판사),《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2008, 책세상),《생태학자 박병상의 우리 동물 이야기》(2002, 복갤럽),《참여로 여는 생태공동체》(2003, 아르케),《녹색의 상상력》(2006, 달팽이),《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2007, 알마)등이 있다. 또한,《녹색평론》과 《환경과 생명》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