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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특별기고

동아시아의 인권은 누가 지킬 것인가.

by anarchopists 2019. 1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12/25 06:01]에 발행한 글입니다.


같은 날 사형집행한 북한과 일본,
차이점과 공통점은?

北 장성택·日 살인범 같은 날 사형...다른 범죄에 다른 재판 진행
지난 12월 12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 동아시아 다른 장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 곳은 북한, 사형수는 장성택이었다. 북한의 초고위급 인사인데다가 그 동안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던 권력자에 대한 사형집행이어서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다른 한 곳은 일본, 사형수는 살인범 후지시마 미쓰오와 가가야마 료지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연속살인 사건의 범인으로서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날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두 사건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 장성택은 북한의 초고위급 인사로서 오랫동안 북한의 지도부를 구성해왔다. 북한의 권력구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이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에 미치는 영향도 엄청나다. 이에 비해 일본의 사형수들은 잔혹한 연속살인범일 뿐이었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장성택은 사형이 선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만 재판을 받았고 즉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사형수는 1986년과 2000년의 살인 사건 이후 1심과 2심 재판, 일본의 최고재판소(대법원)의 판결까지 모두 거친 후 사형이 확정된 후 한참 있다가 사형이 집행되었다.

‘인혁당’ 연상케 하는 장성택 사형집행, 정상적 재판이라 할 수 없어
특히 장성택의 재판 및 사형집행 과정은 정상적인 법률 집행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원래 중대한 사건일수록 신중하게 재판을 하고 신중하게 집행해야 한다. 혹시 있을 수 있는 오판을 염려해서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상소제도를 두고 원칙적으로 세 번 재판을 하는 삼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 헌법도 군사법원이라고 하더라도 상고심은 대법원에서 관할하도록 하여 재판을 신중하게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은 단심제를 채택할 수 있게 하면서도 사형을 선고한 경우에는 단심을 배제하고 대법원에서 상고를 받아 심리하도록 하고 있다. 중대한 사건일수록 신중한 재판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판결 후 즉시 사형을 집행한 것은 우리의 ‘인혁당 사건’을 연상시킨다. 1975년 유신정권하 사법부는 인혁당 관계자 8명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정부는 사형선고 후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한국 사법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판결이고 집행이다. 법관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판결이 바로 이 판결이다. 인혁당 사건은 재심을 거쳐 무죄가 되었고 배상도 받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가 북한에서 벌어진 것이다. 사형선고와 집행과정을 보면 인혁당 사건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반국가사범, 파렴치범이라고 하더라도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이번 장성택의 재판과 사형집행은 이러한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법절차 보장받은 日 사형수...그러나 ‘국가에 의한 살인’이란 본질은 동일
이에 비해 일본의 사형수들은 최소한 법률이 보장하는 절차는 모두 보장받았다. 하지만 일본의 특징은 여기에 있지 않다. 아베정권 출범 이후 벌써 4번째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8명이 사형되었으니 아베정권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형집행이 있을지 걱정된다. NHK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는 129명의 사형수가 있다고 한다. 아베 정권하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형집행이 있을지 세계가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변 요소를 모두 제외하면 단 하나의 사실만이 남는다. 남는 것은 바로 사형 그 자체이다. 국가가 개인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사형을 아무리 다른 말로 미화해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본질, 살인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누가 목숨을 빼앗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인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살인을 했는가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현대 법률은 생명권을 가장 중요한 법익이라고 본다. 생명이 없다면 그 어떤 권리도, 미래도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권을 절대적이라고 한다. 어떤 위험이나 위협, 침해로부터도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위협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묻지 않는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경우에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의학적 조치를 취한 경우에도 살인죄는 성립한다. 심지어 판례는 보호자의 요청에 의하여 퇴원해서는 안되는 환자를 퇴원하도록 하여 환자가 사망한 경우 의사들에게 살인죄의 방조범을 인정한 바 있다. 1997년의 유명한 ‘보라매병원 사건’이다.

생명을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생명침해, 살인이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이기 때문이다. 국제인권법 체계에서는 사형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인 형벌”(세계인권선언)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문명국의 상징인 유럽에서는 오래전 사형을 폐지했다. 유럽은 1985년 유럽인권협약 제6의정서로 사형폐지를 국제조약으로 발효시킨 것이다. 이처럼 유럽은 국가라고 하여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형제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형벌은 범죄인에 대한 교정, 교화과정이다. 형벌이 문명과 인권의 입장에서 정당화되는 것은 단순히 복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형은 이러한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한다. 그리고 오심으로 인한 피해를 되돌릴 수도 없다. 오심은 형사재판 과정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내재해 있는 문제이다. 위에서 본 인혁당 사건과 조봉암 사형판결은 의도적인 사형판결이었지만 무의식적인 오판도 많이 있다.

사형집행 폐지되니 오히려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는 줄어들어
많은 분들은 사형이 폐지되면 범죄가 더 흉폭화되고 범인이 더 날뛰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람의 목숨은 사람의 목숨만으로 속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인이 있고 이들에 대한 용서는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모두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사형제는 어쩌면 우리 DNA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역사도 오래되었다.

사형제가 폐지될 때 벌어질 상황을 예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은 사실상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이다. 벌써 16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마지막 사형집행은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말기였다. 그로부터 벌써 16년이 지났는데 과연 우리 사회가 우려한 대로 흉폭화되고 더 잔혹한 범죄가 많아졌을까? 통계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형과 무기형을 선고받은 수는 오히려 줄었다.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던 1990년대 중반에는 사형선고 인원이 10-30명 내외였다(가장 많을 때가 1994년 35명, 가장 적을 때가 1997년 10명). 그리고 무기징역은 80-110명 내외였다(가장 많을 때가 1996년 113명, 가장 적을 때가 1994년 76명).

그런데 사형이 사실상 폐지된 이후 10년이 지난 2008년에는 사형선고 인원이 3명, 무기징역은 58명이었다. 그리고 작년인 2012년은 사형은 2명, 무기징역은 23명이었다. 사형은 2002년부터 한 자리 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이상은 사법연감 통계). 사형과 무기징역은 대부분 살인, 강도, 성폭력범죄 등 중대한 범죄에서 인정된다. 사형과 무기징역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러한 범죄가 줄었거나 혹은 최소한 늘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가 흉폭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통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수는 계속 감소해왔다. 1998년 법원은 140,397건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중대한 사건이어서 구속재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이다. 그런데 그 수는 2002년 99,995건으로 10만건 밑으로 떨어진 후 2007년에는 46,274건으로 5만건 이하가 되었다. 작년인 2012년에는 27,341건이 되었다. 15년이 지나면서 무려 11만명 이상이 구속되지 않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15년 전에 비하여 11만명 이상이 구속되지 않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안해지고 흉폭화되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일부 성폭행범죄나 아동상대범죄가 증가하기는 했으나 전체 사회가 불안해졌다는 조사나 보고는 아직 없다.

사형제가 사실상 폐지된 이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사태는 사형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한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형제가 폐지되면 범죄자는 폭증하고 범죄는 잔혹해지고 사회는 광란의 상태에 빠진다는 선전은 사형제를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쪽에서 주장하는 허구일 뿐이다.

흔들리는 동아시아의 인권, 누가 지킬 것인가?
생명권은 인권의 기초이다. 그런데 북한과 일본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인권을 흔들고 있다. 한국은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일본의 사형집행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한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다음 한국에 돌아왔다고 가정해보자. 일본은 재판을 하기 위해 범죄인 인도요청을 할 수 있다. 피해자가 일본에 있고 모든 증거도 일본에 있으니 일본의 요구는 정당하다. 원래 정의는 범죄가 발생한 장소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재판을 받으면 사형을 선고받을 확률이 높고 또 사형이 집행될 수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 재판을 받으면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집행될 가능성은 없다. 이때 우리는 우리 국민인 범죄인을 일본에 인도해야 할까? 이처럼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생명권을 존중한다면 당연히 인도를 거부해야 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외교적 마찰도 생길 수 있다. 이 문제는 사실 일본이 사형을 폐지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처럼 한 나라의 인권수준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친다. 북한과 일본의 사형집행이 동아시아의 인권을 위태롭게 하는 사건이라고 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국은 벌써 16년째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가로서 동아시아에서는 유일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활동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그동안 동아시아 인권의 수준을 높여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의 인권상황은 위태로워졌다. 촛불집회에 대한 탄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아가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는 더욱 심각한 인권침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 집회와 시위의 자유, 정치적 반대의 자유가 탄압받고 있다. 정당의 자유도 침해되고 있고 전교조나 전공노, 철도노조와 같은 노동조합 활동도 탄압받고 있다.

이처럼 국내의 인권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므로 동아시아의 인권문제를 신경 쓸 여력이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국내의 인권상황 개선을 위해서도 국제적인 연대 노력은 필요하다. 국내의 어려움은 국내 여러 민주세력의 연대로, 국제적인 어려움은 세계 여러 인권세력의 연대로 풀어야 한다. 인권이야말로 진정한 국내적, 국제적인 주제이다.(2013. 12.24, 김인회 교수/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위 글은 한국미래발전연구원 http://www.futurekorea.org/에서 보내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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