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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이만열 교수 논단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

by anarchopists 2019. 10.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6/09/09 09:17]에 발행한 글입니다.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


어제 오늘 굵직한 발표들이 있었지만 주목되는 것은 대법원장의 ‘대국민사과문’이다. 오랜 만에 대법원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조심스럽게 그 내용을 살폈다. 대법원장의 담화문을 두고 언론에 따라서는 ‘대국민사과문’이라고도 했고 ‘대법원장의 사과’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국의 법원장과 법관을 상대로 청렴을 강조하는 훈시가 주된 내용이었다. 끝부분에서 “국민 여러분께 실망과 충격을 안겨 드린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로 맺었다. 이 글귀 때문인지, 어느 매체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 대국민 사과문>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법원장의 대국민사과문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다.
대법원장은 전국법원장회의에서 김 모 인천지법 부장판사의 일탈에 대해 당혹, 참담한 심경을 안타깝게 호소한 것으로 안다. 대법원장이 강조한 바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탈은 법관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대법원장은 대부분의 법관들이 이런 일탈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강조함으로, 청렴한 생활을 통해 법과 양심을 수호해 온 많은 법관 사회에 그런 일탈이 일반화된 관행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렇게 함으로 3천여명에 이르는 법관의 자존심을 결코 건드리지 않았다.

이 날 담화를 보면서, 법관 개인의 일탈을 안타까워하는 대법원장이 그 못지않게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에 대해서 눈감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바로 2013년 초에 대법원에 제소한 ‘대선무효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무신경이다. 180일 이내에 끝내야 한다는 법규에도 불구하고, 그 일곱배의 시간이 경과했는데도 아직 그 사건은 재판개시조차 하지 않고 있다. 대법원은 왜 그렇게 재판을 미뤄야 하는지 아직 그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법관의 청렴성이 없어지면 법원전체가 타락될 수 있다. 그러나 선거부정 여부를 가리는 문제는 법관 개인의 일탈 못지않게 훨씬 심각한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시체말로 ‘국기(國基)’와 관련된 문제다. 대법원장의 담화를 보면서,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고 외친 예수의 말씀이 기억난다.

엊그저께 새누리당 대표는 국회 대표연설에서 야당이 걸핏하면 ‘대선불복’을 외쳐왔다는 식으로 질타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야당이 대선 이후 끈질기게 대선불복을 주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 기억에는 새정권 출범 후에 새누리당이 무슨 일만 있으면 야당을 향해 ‘대선불복이냐’라고 욱박지른 것이 오히려 기억난다. 그러나 야당이 대선불복을 당론으로 외친 적은 없다. 오히려 개인적인 소신을 가지고 국회에서 외친 의원을 두고, 야당 지도부는 그게 결코 당론이 아니라면서 지레 손사래를 쳤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양, ‘대선불목이냐’고 야당에게 욱박지르는 새누리당 앞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그런 일 없다’고 비겁한 태도를 보였던 야당의 태도는 생각만 해도 너무 초라했다. 그 바람에 대선부정의 혐의를 잡고 선거소송을 낸 열정적인 유권자들만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선거가 국기(國基)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선거소송에 대한 재판을 시작조차 하지 않는 대법원의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양심과 법을 수호하는 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지도부와 함께 하는 법관들에게 청렴을 주문하는 것이 공허하지 않을까.


SNS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유권자들이 선거소송을 회피하는 대법관들을 탄핵하겠다고 벼르는가 하면, 그들을 직무유기로 검찰에 고발도 했다. 그러나 한 때 어버이연합 같은 데서 고발이 있으면 득달같이 그 민첩성을 보이던 검찰이 대법관 고발 사건에서는 벌써 1년 수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고발인 조사조차 하지 않는단다. 폭탄 돌리듯, 그 사건을 이리 저리 돌리면서 시간을 끌고 있단다. 이 점에서 대법원과 검찰은 찰떡 공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다간 어느 정도 시간이 더 지나면 재판을 해도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폐기하지는 않을까. 민중의 의로운 분노를 이런 식으로 뭉개면서 ‘낙타를 삼키고 있는’ 오늘의 법원과 검찰, 역사는 이 치욕스런 행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응징해 줄 수 있을까. ‘법과 원칙’을 입에 달고 다니는 그들은 유독 선거법 재판에서는 이렇게 법을 능멸하고 있다.(2019. 9.6, 이만열)

이만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한국사 근대)를 받으셨다.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된 해직교수 출신으로 자주적인 시각에서 한국사를 조망해온 진보적 성향의 원로사학자다. 대학강단에 계시면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숙명여대에서 정년퇴임하신 뒤(1970~2003)에는 국사편찬위원장(2003~2006)을 지냈으며, 요즘은 시민을 대상으로 역사강좌에 전념하고 계신다.

학술면에서도 큰 공적을 남기셨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잡지 중 하나인《복음과 상황》을 창간하였고 단재 학술상(1992), 독립기념관 학술상(2008), 용재 석좌교수상(2008)을 수상하셨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근대역사학의 이해》,《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등이 있다. 최근에역사수상집으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2010)을 내셨다. 현재 <함석헌학회> 학회장을 맡고 계신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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