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이만열 교수 논단

건국절 논란-대한민국 정부수립은 1919년이다

by anarchopists 2019. 10. 2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6/08/30 05:46]에 발행한 글입니다.


‘건국절’ 주장은 독립운동과 헌법정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올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하여, 작년에 이어 올해도 보란 듯이 ‘건국’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역사학계는 광복절 경축사에 나타난 ‘건국’ 이란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것과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서 성립 발전한 나라임을 확고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개진합니다.

이른바 ‘건국절’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이명박 정권을 전후한 때입니다.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8년에 취임한 그는 ‘건국60년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고 그 해 8.15경축사를 통해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60년”이라 선언하고, 기념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1948년으로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학계의 반대목소리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던 그가 훈장까지 반납하겠다는 광복회원들의 분노 앞에서는 주춤했습니다. 그 해 8.15기념행사가 ‘광복 63주년 및 건국 60주년’이라는 이중적인 이름으로 어정쩡하게 치러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국회에서는 8.15를 종래의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었고, 「건국공로자예우에 관한 법률안도 제안되었지만 국민 여론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바탕 일어난 ‘건국절 소동’으로 인해 부각된 것은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되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 전에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구분하지 않아 혼효된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동’을 계기로 역사학계도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거기에 따라 건립한 것이 대한민국이다. 1919년 4월 10일 13도 대표 29명이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모였다. 그들은 그 모임의 이름을 ‘임시의정원’이라 하고 그 이튿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발표했다. 그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이 조항은 임시정부 하에서 다섯 차례의 개헌 때에도 계속되다가 1948년 제헌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계승되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을 운용하는 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해외에 임시정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서울(한성)과 블라디보스톡, 상해에서 각각 세워졌으나, 1919년 9월 세 임시정부를 통합, 대통령제의 통합임시정부로 발전시켰다. 이게 대한민국의 건국이요, 임시정부(상해임정)의 설립이었다.

상해 임정은 의정원과 정부로 구성되었고, 출발 때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헌법적 기초 위에 서 있었으며, 뒷날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정당정치에 좌우합작 정부를 형성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임정의 외교적 활동도 괄목할 만하여, 1943년 말 미국, 영국, 중국 세 거두의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을 통해 전후(戰後) 한국독립을 유일하게 약속받는 성과도 거두었다. 중국이라는 외국 영토에서 독자적인 광복군을 예하에 두었던 임정은 미영중 연합국과 항일공동전선을 펴는 한편 국내 정진대 파견을 준비하다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인식에 의거하여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의 출발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1948년 5월 총선 후 회집된 제헌국회는 헌법 초안 전문(前文)에 대한민국의 뿌리를 명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헌법기초위원회 초안에는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정도로만 밝혔습니다. 이를 인지한 이승만은 국회 본회의 때 의장석에서 내려와 평의원으로 발언권을 얻어, 새로 수립되는 정부가 임정의 법통계승을 명시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제헌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시했는데, 이에는 이승만의 노력이 컸습니다. 제헌헌법의 그 정신은 현행헌법에도 계승되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는 것으로 명시되었습니다. 다른 나라 헌법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의 설립근거를 분명히 밝힌 데는 이런 경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출범식 때 청사에 걸린 새 정부 출범 축하 현수막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국민축하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연설에서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起算)할 것”이라고 언명한 이승만은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정부의 관보뿐만 아니라 공식문서에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썼습니다. 이처럼 이승만이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시작된다고 밝힌 것은 뒷날 그를 ‘국부’로 모시겠다는 이들이 혹시라도 대한민국의 근원을 소홀히 할까봐 이렇게 쐐기를 박아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직도 이승만을 ‘국부’ 혹은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지만, 그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이승만이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는 역사의식입니다. 그가 “민국이라는 명칭에 표시되는 민주정치제도를……남의 조력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벌써 30년 전에 기미독립운동으로 민국정부를 수립하여 세계에 선포하였다”고 언급한 대목이나, “기미년 독립을 선언한 것이 미국이 1777(sic)년에 독립을 선언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역사”라고 강조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한국의 민주국가 원년 1919년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역사의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공용 연호를 단군연호로 바꾸려고 한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이를 공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1949) 기미독립운동연호를 재고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즉 기미독립운동연호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광영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요 또 민주국 기초가 이미 그 때에 잡힌 것을 표시할 수 있고 또 무저항주의를 우리가 시작해서 성공된 사적을 표현한 것이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남녀선열들의 위대한 공업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탄생이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했는데, 이러한 역사의식을 공유하는 데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1948년 정부수립에 참여한 이들은 대한민국이 기미년(1919)에 건립되었다는 것과 1948년에 건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국가는 국토·국민·주권이 있어야만 성립한다고. 그러면 이승만과 제헌국회 때의 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은 그걸 모르고 1919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했을까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당·정·군을 갖고 좌우합작 정부를 통해 외교활동을 벌이며 국내외의 독립운동과 기맥을 통하면서 그 영도적 성격을 가졌던 임정을 높이 평가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혹자는 또 말합니다. 임정 때의 대한민국은 당시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했으니 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그러나 어떤 국가든 독립선언과 해방, 그리고 정부수립과 독립승인 사이에 시차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럴 경우 정부수립이나 독립승인이 아니라, 독립선언이나 해방을 독립기념일로 삼곤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독립선언의 해를 독립기념의 해로 삼는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입니다.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이 국제적 승인을 받은 것은 그 7년 후인 1783년이고 연방정부를 세우게 된 것은 13년 후인 1789년입니다. 미국이 그들의 국가 출발시점을 1776년으로 못 박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나 중남미의 멕시코, 브라질,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도 독립선언의 시점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3·1독립선언을 국가의 출발로 삼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이 국제적 사례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국가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정부가 민족의 독립운동과 국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인색하게 구는지, 반면에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통치의 연장선상에서 나라가 이뤄졌다고 보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부정, 폄훼하는 뉴라이트의 주장에는 왜 그렇게 쉽게 동조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건국)’으로 하지 않으면, 그 3주 후인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는 북한에 비해 국격이 떨어진다는 것을 ‘건국절’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북한은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승을 거부하고 1948년에 ‘건국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계승할 수 있는 국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이 있었고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마저 계승했으니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수립일로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남측이 ‘정부’를 수립했고 북측이 ‘국가’를 건립했다고 해서 이를 국격의 문제로 따질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1948년에 정부를 수립했다고 서술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서 1919년에 이미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더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박근혜정부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국정화로 확정하면서 ‘1948년=대한민국 수립(건국)’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인식은 올해 대통령의 광복절경축사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역사교과서에 서술된 ‘1919년=대한민국 수립’, ‘1948년=대한민국 정부수립’ 설을 뒤엎는 충격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1948년=대한민국 수립’과 ‘건국절’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고, 헌법정신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국제사회의 사례와도 어긋나므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논평은 역사학계의 공식 논평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