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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박병상 박사 환경칼럼

후손을 위해 핵발전소를 폐기해라

by anarchopists 2019. 12.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1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윤리위원회가 검토하는 핵발전

윤리위원회라 하면 먼저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이 생각난다. 배아를 복제해 얻은 줄기세포를 연구 재료로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비당사자인 생명공학자는 물론이고 종교계와 윤리학자들이 모여 검토하는 위원회, 그런 위원회가 독일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올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에 7등급의 사고가 발생한 뒤 긴급 소집한 독일의 윤리위원회는 생명윤리를 심의하는 상설 윤리위원회와 별도로 핵발전소의 운명을 놓고 7주 동안 심도 있는 검토를 수행해 폐쇄 권고를 내렸다.

왜 윤리위원회를 소집한 걸까.
교통사고나 작업장 사고와 같이 실제 사상자가 많은 분야에 대한 논의도 윤리위원회에서 담당하지 않는다. 아무리 끔찍해도 그렇지 핵발전소를 전담하는 에너지 관련 위원회도 있을 텐데, 왜 하필 윤리위원회였을까. 찾아가 물었더니 그 윤리위원회에 참여한 베를린 자유대학의 미란다 슈로이어 교수는 “세대 간 형평성”을 언급했다. 핵발전소로 챙길 이익은 현 세대가 누리지만 부담은 후손의 몫이므로 정의 차원의 검토가 필요했다는 거였다. 위험천만한 핵폐기물 처리를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거의 또는 전혀 공급받지 않은 수십 또는 그 이상의 다음 세대에게 전가하는 기술이 핵발전이기 때문이다. 폭발 25년이 지난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주변을 둘러보라. 지금도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부모가 낳은 아이와 그 후손은 대를 이어 장애를 안고 태어나거나 면역력이 아주 약하다. 후쿠시마도 그럴 것이라 지적하며 독일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슈로이어 교수는 강조했다.

우리보다 산업이 발달된 국가가 독일이다. 전기가 모자라면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하는 걸 독일이 모르지 않을 텐데, 정부는 윤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2022년까지 전기 생산의 22퍼센트 정도를 담당하는 17기의 핵발전소를 완전히 퇴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윤리위원회에 참석한 핵발전 관련 업체와 전문가들이 전기 부족으로 인한 산업 마비와 같은 문제를 상정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지만 진정성에서 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계를 비롯해 다음 세대를 대변하는 인사들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핵발전소를 순차적으로 퇴출해도 산업이 마비될 정도로 전기가 부족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을 윤리위원회에 심었고 나아가 만에 하나 발생할 사고가 후손에게 미칠 악영향을 설득력 있게 호소하면서 폐쇄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철저하게 안전관리한다고 정평이 난 일본에도 사고가 일어나는 게 핵발전소라면 독일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데 윤리위원회는 동의했고, 후손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폐쇄해야 할 발전 방식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독일은 당장 후쿠시마와 같은 방식이며 가동한 지 오래된 7기의 발전소와 문제가 있어 이미 가동을 중단하고 있던 1기는 퇴출시킬 것이고 남은 9기도 연차적으로 폐쇄할 예정이라는데, 그러고도 전력 공급의 부족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인가. 독일은 그 대안을 이미 마련해 두었다. 단기적으로 전기 수출을 자제하고 화력발전소의 출력을 높이는 대안을 강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장기 적으로 바람이나 태양과 같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확충해 온실가스 배출도 크게 낮출 것이라 다짐했다. 핵발전소가 거의 꺼질 2020년이면 독일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1990년 대비 40퍼센트 이하로 줄이며 유럽을 선도할 예정이란다. 해발고가 높은 산지의 비율이 우리보다 낮을 뿐 아니라 태양 빛이 그리 강하지 않은 독일의 자세가 그렇다. 현재 독일의 과감한 에너지 정책은 이웃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 영향을 주어 핵발전소 폐쇄로 이어질 전망이고, 잠시 핵발전소 도입에 마음이 흔들렸던 이탈리아는 핵발전소 없는 국가를 재천명했다고 한다.

지난 6월 30일 독일의 환경단체 회원 100여 명은 그들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17기 핵발전소 모두를 당장 끄라는 집회를 소박하게 열었다. 현 수준의 독일의 전력 공급이면 핵발전소를 모두 폐쇄해도 산업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천명하는 집회였는데, 집회에 모인 고작 100여 명은 사실상 독일 전체 시민의 의견을 반영한다. 회비를 납부하는 수십만의 회원을 가진 환경단체의 주장이므로 시민사회에 바로 전달될 테고, 정치권은 100명이 외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핵폐기물 중간처리장의 최종처리를 1970년대부터 반대하고, 핵폐기물 운송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행동에 거침이 없던 독일 환경단체들의 오랜 노고는 프라이부르크 시의 핵발전소 입지를 시민들이 막아낸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시민들이 제집과 창고, 교회나 관공서의 넓은 지붕에 태양광 발전 패널을 붙이는 행동으로 전개되었다. 태양이나 풍력과 같은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개인이 전기를 생산할 때 기존 배선망에서 공급되는 전기의 가격과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 차이를 정부에서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는데 주도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현재 독일 어디서나 태양광 패널이 붙은 지붕과 풍차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모든 핵발전소의 가동을 당장 멈춰도 전력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대안을 세워둔 독일이지만, 소비자들이 전기를 마음 놓고 쓴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지속적인 핵발전을 위해 강고하게 뭉친 이른바 핵동맹의 주장처럼, 정전과 산업마비의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핵발전소 퇴출과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의 확보보다 중요한 것은 전기 에너지의 효율화와 절약이다. 그래서 그런가. 겨울철 실내에서 반팔 소매의 얇은 옷을 입고 지내는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인들은 여름이라도 비치해둔 에어컨을 웬만해서 작동하지 않는다. 1954년 당시 세상을 풍미한 할리우드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이 된 독일 하이델베르크는 작은 강에서 얻는 수력발전으로 만족해 저녁 이후 도시가 어둑하다. 영화를 촬영했다는 맥줏집은 간판에 네온사인이 없고, 안에 들어서면 한참 기다려야 주위를 구별할 정도다.

핵발전소 수가 세계 6위, 핵발전소 주변 인구 밀집이 세계 1위인 우리나라는 햇빛이 많고 바람도 부족하지 않지만 재생 가능한 에너지 활용도는 형편없이 낮다. 국민소득 1달러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전기는 일본의 187.8퍼센트, 독일의 234.6퍼센트, 영국의 무려 321.8퍼센트에 달한다고 한국전력공사의 공재된 자료를 근거로 계산해 《녹색평론》 최근호에서 밝힌 인천의 홍익경제연구소 하석용 소장은 유럽과 일본하고 비교할 때 우리의 전력예비율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고 덧붙였다. 전력예비율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발전기의 발전 능력 수치를 조작한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다. 그렇게 위기를 조장한 뒤 발전소 추가 건설을 당연시할 핵동맹은 후손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게 분명하다.

곧 삼복더위가 다가온다. 전기 과소비를 조장하는 광고를 그대로 두는 정부는 관공서의 냉방온도 기준을 낮추는 쇼를 벌이면서 전력예비율에 비상을 걸고 산업이 마비될 수 있다며 난리를 칠 것이다. 에너지 효율화에 예산 지원 없이 이따금 절약에 생색을 낼 따름인 우리 정부는 핵발전소 퇴출은커녕 후쿠시마 이후 위축된 핵발전소 시장을 다시 선점하려 기회를 엿본다. 한술 더 떠 핵동맹은 과학기자협회와 손을 잡고 “핵발전소 수출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이슈 토론회’를 지난 7월 13일 서울의 특급호텔에서 마련했다. 경쟁자인 일본을 앞지를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원인은 지진에 의한 해일만이 아니었다. 수명을 다시 10년 연장한 노후 핵발전소가 하필 활성 지진대 위에 존재했지만, 1979년 미국의 드리마일과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그랬듯, 다분히 사람의 실수였다. 설계가 잘못 되었든 사소한 실수로 비롯되었든, 핵발전소 사고의 참화는 진작 예방할 도리가 없다. 그런 사고를 핵발전 역사 30년이 지난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납득할만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은 채, 낡은 고리 핵발전소 1호기의 수명을 10년 연장하기로 밀어붙인 정부는 후쿠시마의 교훈에 관심 따위를 두지 않고 핵발전소를 더 짓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태세다. 물론 그런 결정 과정에 윤리위원회를 소집했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다. 이제 우리 후손에게 집중될 형평성의 치명적 훼손은 누가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2011.10.13. 박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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