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구원의 종교
종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나 그 성격상 이상적인 세계, 관념적인 세계만을 강조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도록 만드는 구실을 하곤 한다. 종교의 공적이고 사회 구원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오로지 개인의 영혼 구원과 지복만을 지향하는 종교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만큼 등한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종교는 자칫 현실을 외면한 환상과 가상에 빠지게 될 수 있다. 함석헌의 지적은 바로 이러한 종교 현상에 있다. “종교가는 대개 종교는 현실에는 관계없고 다만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일이라 생각하고 현실에 대하여는 피하고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현실의 문제에 호소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종교가 과연 건강한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현실을 경시한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종교로 전락을 하게 된다면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 혹은 의식 세계의 분리를 조장하는 종교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종교의 언어와 행위가 무엇을 지향하는가 혹은 무엇을 발언하는가는 그 종교의 신념과 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함석헌의 종교 발언의 본질에는 반드시 인간의 도덕적 인격이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도덕적 인격은 곧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 전제요 영혼 구원을 위한 선결 과제인 것인데, 그 자유로운 인격은 결국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는 존재를 일컫는다. “영혼이 구원 얻기 위해 먼저 도덕적인 인격이 자유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자유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현실의 발길에 채는 돌을 우선 치워놓지 않을 수 없다.” 도덕적 주체는 종교적 주체와 연관된 것으로서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행위 주체인 바 현실의 비합리성, 비인간성, 비정신성 등을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원이 곧 종교적 주체의 사회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의 영혼 구원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타자의 문제, 국가 공동체의 인습 문제에 대해서 종교가 주체적 참여 발언에는 무관심한다면 총체적 구원을 상실할 수가 있다.
함석헌은 예수의 발언과 행위가 현실을 무시하지 않았음을 간파한다. “목적은 하늘에 있으나 일은 땅에 있다.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하나도 없다. 의 의미에서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셨지, 땅을 버리고 곧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십사 하시지 않은 것은 깊이 새겨 알아야 할 말씀이다. 현실을 피하고 구원은 없다.” 예수는 이상 세계, 의식 세계, 사후 세계를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현실의 문제를 실재적으로 접근하여 신앙인의 공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죽어서 개인의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던가. 삶의 현실을 파괴하는 적들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문제를 개선, 개혁하도록 해야 한다고 설파하셨던 분이 아니던가. 함석헌이 강변하고 있듯이, 예수도 “현실을 피하고 구원은 없다”고 생각했던 분이 아닐까.
그럼에도 종교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종교인의 생각의 발목을 붙잡는다. 신의 은총은 오직 개인의 영혼 구원에 있다는 논리로 새삼 영지주의적인 구원론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당화와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신앙 논리는 민중을 기만하고 그들로 하여금 영혼과 세속을 가르면서 그 경계에서 원죄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강화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종교인의 직무유기나 다름이 없다.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 발언과 그들의 논리가 민중이 진보를 꾀하려는 주체적 자아를 분열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요,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참된 종교라면 민중을 일깨워야 한다. 가능한 한 니체가 말했던 ‘지고한 정신의 보편적 운동인 계몽’을 민중 스스로 하도록 해야 한다. 칸트도 철학의 세 가지 규칙에서 말했다시피 “스스로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신앙적 이익관심과 사적 관심에서 종교의 공적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종교인의 사유 체계와 신앙의 신념으로 인해서 사회, 정치, 경제 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만들어서 현실세계가 상실 된 채 이상적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신앙의 주체화일 수 있다. 현실과 이상을 통합하여 사회적 진보와 신앙의 본래성을 의지적으로 개인이 결단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종교인은 죄악을 미워해야 한다. 죄악을 미워하는 신앙의 순수성은 현실 문제에서 부딪치는 현상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항한다는 의미이다.
“미워하지 말란 것은 나를 죄악적으로 대접하는 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지 죄악 그것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다. 죄악을 극히 미워하고 거뤄대는 것이 종교다. 그것은 구원을 주마 하지 않고 민중으로 하여금 제 구원을 제가 싸워 얻게 한다. 제가 얻는 것이, 다시 말하면, 살아난 것이, 참 생명 아닌가? 아무도 악과 싸우지 않고 선한 영이 될 수 없는 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죄악은 곧 현실적 사실, 현실은 곧 죄악적 존재, 죄악은 사회적 현상인 것이므로,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사도 요한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한 것은 이것이다.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우리 종교는 현실적 과학적이어야 한다.”
죄악의 현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자신의 종교나 그 종교를 갖고 있는 종교인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이다. 사회의 부조리, 사회악과 싸우면서 이 현실을 구원할 수 있으려면 종교인이 연대해야만 한다. 사귐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소통하는 데 있지 않다. 사귐은 연대함이다. 사회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힘을 결집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예수의 정신, 종교적 정신을 고양시키고 그 힘을 통해서 현실의 죄악을 타파해 나가야 한다. “사회악과 싸우기 위해 우리의 겨누어야 할 목표는 둘이다.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그 민중을 더럽다 하고,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아프게 하는 자다.” 그러므로 민중이자 개별자인 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민중의식을 가지고 이 세계를 개혁하겠다고 하는 민중인 종교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하신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을 섬겨야 한다. 함석헌은 말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요 나라일수록 민중을 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진리의 부르짖음은 결코 부르주아에게 있지 않다. 진리를 발생시키고 그 진리를 살겠다고 하는 개방성은 민중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사회적 기득권자들은 혁명을 거부한다. 진리를 실현시키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회악을 퍼뜨리는 주체가 되는 기득권자는 그래서 민중을 섬기지 않는다.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은 자신들을 위한 부르주아의 하느님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해주는 능력의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고 이상 세계, 관념 세계조차도 부르주아의 손에 의해서 구성되어야 하고 현실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민중이 공의(公義)를 세우는 신앙의 혁명, 신앙의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희망이 민중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민중이 하나님이 발이라 하는 말은 민중은 보이는 전체란 말이다. 도덕적으로 말할 때엔 문제는 전체에 있는데, 공의(公義)라 하는 그 공(公)은 곧 전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직이 있어야 한다. 민중을 결집시키고 의식이 있고 계몽이 된 민중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연대 조직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낼 수가 있다. 아마도 함석헌은 그것을 무교회주의로 보고 있는 듯하다. 설령 무교회주의가 아니더라도, 그의 표현대로 허리에 수건 한 장을 둘러 맬 수 있을 정도의 섬김의 조직, 민중을 떠받들 수 있는 조직을 염두에 둔 것 같다. “하나 되는 믿음으로 새 조직을 일으켜야 한다. 사귐이 생겨야 한다. 이 민중을 건지기 위해 최소한도의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귐은 연대함이다. 그 연대의 정신, 그 연대의 힘을 정신이 성숙한, 스스로 계몽이 된 도덕적 종교 안에서 찾는다면 어려운 일일까?
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비정규직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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