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로부터의 신앙 독립선언
어떤 모임이든 이름을 붙여야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모임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모임의 성격은 거기에 국한되고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름으로 인해서 그 이름 범주 바깥으로 벗어나는 말과 행위가 전개될 때는 모임의 정체성에 의해서 문제의 소지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함석헌은 종교적 색채를 띠고 결성된 공동체를 단순히 ‘모임’(meeting)이라고 했다. 무교회주의 본래성을 담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하기가 애매하고 어렵다. 무교회가 모임은 아니다. 무교회주의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바로 모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함석헌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했다. 제도적, 교리적, 체제적, 조직적인 교회의 틀을 넘어서 있으니 그 모임의 ‘사람’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조직과 교리를 앞세우는 종단일수록 사람은 안 보이고 그 형식과 외형만이 보인다. 사람이 먼저 있고 제도와 조직이 있는 법인데, 제도적 종교들은 제도나 조직이 먼저이지 사람은 나중이다.
함석헌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사람의 권위가 우선이지 조직과 제도의 권위가 우선일 수 없다. 그런데 종교 공동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종단이 조직과 제도의 권위를 앞세워서 사람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사람의 권위에 의해서 운영이 되어야 하는 종교 공동체가 조직과 제도의 권위 하에 움직이니 사람의 이성과 신앙을 자유롭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임’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 새로운 모임이 결성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종래의 종교 공동체의 조직, 교리, 체제, 제도, 조직 등은 더 이상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조직 그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 온갖 부정적인 장치들과 위협을 제거하려고 하지, 긍정적이고 순기능적인 종교 공동체의 모임을 위해서 조직을 운영하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함석헌은 신앙의 독립군이 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또 하나의 종단과도 같은 무교회를 내세워서 다른 사람들처럼 종단을 창립하여 종교 경쟁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함석헌은 무교회조차도 외래적인 산물(일본혼이나 우찌무라의 무교회)로 인식을 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종교는 우리만의 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나를 살리는 신앙은 내게 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는 말을 하면서 신앙의 독립성을 선언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처음 무교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자신의 신앙을 객관화시킬 수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결론은 자신의 신앙이 무교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명은 민중을 일깨우는 소리, 새로운 바람, 새로운 소리가 들어오는 구멍을 뚫기 위해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깊어 가는 밤에 민중이 잠들지 않도록 그들의 가슴에 새로운 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늘 깨어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함석헌의 성서모임 혹은 예배모임은 민중을 위한 모임으로서 ‘독립신앙’, ‘독립정신’을 모토로 한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개별화된, 개인화된 신앙을 전제로 한다. 물론 여기에서 ‘어디에도’라는 것은 제도, 조직, 교리, 체제 등을 일컫는 것이다. 종교의 권위는 “스스로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인 독립성(페터 비에리; Peter Bieri)을 갖춘 주체적인 민중 자신에게 있다. 신앙은 스스로 홀로 서야 하고 그러면서 인격적인 신을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을 ‘인격적’이라고밖에 달리 단언하지 못한다면, 신앙은 생명의 최고 단계인 인격과 인격적 존재의 만남을 의미한다. 어떤 인위적인 틀을 벗어나서 종교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면 그저 인격적 존재만을 지향할 뿐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것의 운동성, 누멘적인 것(the numinous)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함석헌은 그 신비한 존재, 신적인 것을 바로 인격에서, 양심에서 만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룩한 존재, 종교적 체험의 원형은 가시적 공간, 인위적 조직과 틀이 아니라 바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무형의 공동체, 인격적 공동체, 더 구체적으로 개인의 인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직, 전통, 교리, 제도, 체제 등이 권위가 될 수 없다. 그것 역시 거룩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체험을 공동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동체라는 것을 앞세워서 하나의 유형의 조직으로 종교적 체험의 원형을 재단하려는 시도는 인격과 최고 인격의 만남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종교적 체험의 대상을 정리하고 구성하면서 생겨난 범주가 사람의 인격 안에서 거룩한 존재의 운동성, 신성한 것의 드러남, 곧 성현(聖顯, hierophany)을 제한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성현은 “어떤 신성한 것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낸다”는 것인데, 이 무한성을 확장하지는 못할망정 그 신의 본능을 더 빈약하게 만들어버린다.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ade)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거룩한 공간의 단절과 균열적 성격을 기술한 바 있다(참조 출애 3,5). 그러한 공간은 거룩하며 강력하고 뜻있는 장소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혹자는 종교 공동체가 하나의 거룩한 공간으로서 다른 공간과는 다른 비균질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직, 체제, 전통, 교리, 제도 등을 견고하게 구축한 종교 공동체일수록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공동체가 거룩한 공간으로서의 비균질적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집합체인 종교 공동체 안에서 바로 새로운 세계, 가능 세계(possible world)를 만들고, 다른 모든 장소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특권적인 장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안에서의 사밀한 종교적 체험, 종교적 행위, 종교적 가치라는 것이 변질되고 탈신성화되는 경향성을 종종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신앙을 갖겠다는 의도가 종교 공동체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단정 짓고 바라보는 것은 매우 불순한 것이다. 모든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인격적인 신, 인격과의 교섭을 가능케 하는 신을 나의 인격으로 만나겠다는 것을 거부할 의사가 조직과 제도, 그리고 교리가 독선적으로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결국 인격이 아닌가? 인격적 공동체, 인격적 모임이 우선이고 제도, 조직, 체제, 심지어 교리는 그 인격적 모임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 공동체는 앞뒤가 바뀐 것 같다. 오히려 조직, 제도, 체제 등을 강조하는 종단일수록 거룩한 것, 거룩한 존재 그 자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더 세속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거룩한 존재를 담아내는 공동체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개별 인격 안에서 거룩한 존재의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독립신앙, 독립정신을 주창하는 인격적 모임의 공동체라 볼 수 있다.
종교적 무의식의 초자아(superego)가 제도, 조직, 체제, 심지어 이념이나 신념에 의해서 형성된다면, 종교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나 다름이 없다. 종교나 정신분석학이 자아의 욕망을 승화시키고, 주체를 회복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성에 둔다면, 주체를 구조화시키는 내외부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 가타리(F. Guattari)는 이렇게 구조화된 주체와 욕망을 넘어서 무의식이 타자의 욕망을 수용하는 ‘내면의 틀’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른바 무의식의 자기발생성과 이질발생성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의식이 억압된 것의 저장소나 상징의 저장소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창조해내는 재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종교적 무의식이 타자의 욕망에 의해 축조될 때 독립신앙과 독립정신은 불가능하다. 내면의 틀을 바꿈으로써 주체의 확인과 승인, 그리고 새로운 주체로의 이행이 된다면 신앙 주체가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무의식이 타자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 공동체의 서술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는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
김대식(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비정규직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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