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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의 시비평론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탓하라!

by anarchopists 2019. 10. 2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5/01/27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탓하라!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산은 자신의 존재를 열어 밝힌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권태를 모른다. 산이 봉기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명체를 끌어안고 있는 산은 늘 물음을 제기하고 동시에 답을 제시한다. 산은 그 자리에서 자연의 신비를 품고 있어서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존재론적 해답을 발견한다. 말하지 않는 해답, 그것은 산만이 줄 수 있는 고유성이다. 그러니 탓할 일도 아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 속에서 거주할 세계로 인식하지 않을 바에는 아예 만남조차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산을 향해 조소도 심지어 정복과 지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 산이 끄달리기라도 하던가? 산, 즉 자연(physis)은 “모든 본질적 존재자가 그 현존 상태로 나타나고 그리고 그 부재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산의 들고 나감은 흔적도 없다. 흔적조차도 없는 산을 향해 조소를 보낸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산의 존재는 늘 그러한 상태로 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 차라리 허허로운 웃음으로 날 마주대하듯, 산을 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시인이 산을 의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의심이란 이미 존재 안에 가정된 확신과 뒤섞인 신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드는 이성의 자기 경계요, 비판이다. 산을 의심한 것은 산의 존재를 인간실존의 본질의 현존과 기댐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산의 존재를 의심해도, 산은 산으로서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보아도 볼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의심은 오히려 사태에 붙잡혀 있고 몰두해 있는 것이다. 산에 붙들린 상태, 그것이 곧 시인의 의심이다. 자신의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큰 산의 존재는 이성과 감성을 압도하고 실존을 파괴하려는 듯이 서 있다. 산에 대한 감정과 기분이 지속될수록, 산은 더 이상 ‘그것’(It)이 아니라 너, 당신, 그대(Thou)로 다가온다. 산 앞에서, 산 옆에서, 산 뒤에서, 산 안에서, 산 위에서 우리는 지루할 틈도 없다. 그대를 만나는 것이기에 예의와 설렘, 회귀와 귀속의 본능으로 다가선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이제 닮고 싶은 마음과 표정이 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의 몸, 특히 나의 눈은 그대, 곧 산에 내맡기며 산에 의해서 포섭된 눈길로 나를 보고 산 그 자체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산은 도구와 수단이 되지 않고 내가 가진 호기심은 산의 호기심이 되어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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