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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이재봉 교수 칼럼

정부의 폭력탄압과 민중의 비폭력투쟁

by anarchopists 2019. 10.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5/12/05 05:16]에 발행한 글입니다.


정부의 폭력탄압과 민중의 비폭력투쟁:
간디와 함석헌의 비폭력저항을 바탕으로



1. 폭력의 종류와 특징: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폭력은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재물에 물리적 피해를 가하는 인간의 공격적 행위를 일컫는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구체적 행위자에 의해 물리적으로 저질러지는 직접적/물리적/신체적 폭력과 국가의 법이나 사회제도 등에 의해 구조적으로 자행되는 간접적/구조적/제도적 폭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통념에 따라 폭력의 개념을 비합법적이거나 공인되지 않는 무력의 사용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크다. 그들은 국법을 어기거나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에 대한 물리적 폭력 행위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면서, 그러한 물리적 폭력을 불러온 법률을 비롯한 정부의 구조적 폭력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폭력은 정부 또는 지배세력이 그들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흔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행사한다. 피지배층 또는 민중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덜 흔하게 그리고 덜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정부의 통치 또는 ‘위로부터의 폭력’이 민중의 저항 또는 ‘아래로부터의 폭력’을 부르는 것이다. 지배세력의 구조적 폭력은 크고 체계적이지만 지속적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으며 드러나더라도 통치행위로 정당하다고 묵인되기 쉽다. 피지배층의 물리적 폭력은 작고 국지적이지만 일시적이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고 불법행위로 간주되는 특징이 있다.

직접적/물리적/신체적 폭력은 동적이고 잘 드러나며, 그것이 불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이라는 인식을 준다. 이에 반해 간접적/구조적/제도적 폭력은 전자보다 훨씬 심각한 폭력성을 내포해도 정적이고 쉽게 눈에 띄지 않으며, 사회구조에 내재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2. 폭력적 정부 또는 정부의 폭력이 유지되는 이유

아무리 정통성이나 합법성이 부족한 정부나 지배세력이라도 지지와 묵종(默從)하는 세력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첫째, 권력이나 이권을 얻기 위해 정부에 직접 참여하거나 지배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과 관리 그리고 ‘어용’ 지식인들이다. 유신헌법을 만들고 그 체제를 받들었거나 전두환 정권의 내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지식인들이었다.
둘째, 지배세력과의 인연이나 정체성을 바탕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혈연, 학연, 지연에 따라 이런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 예를 들어, 박근혜가 아무리 퇴행적이고 폭력적인 정책을 펼쳐도 무조건 지지하는 대구.경북 주민들이 많다. 학살자와 독재자로 비난받는 전두환조차 그의 모교 대구공고 동창들에겐 영웅으로 떠받들여지고, 그의 호를 딴 ‘일해’공원이 고향 합천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셋째, 폭력적 정부 또는 정부의 폭력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해서 습관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로부터 왕이나 통치자를 묵종하거나 추종하는 게 전통이나 관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넷째, 정부나 지배세력의 부정과 불의 또는 무능과 횡포 같은 폭력을 인식하더라도 불이익을 당할까봐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용기와 소신이 부족해서 굴종하는 것이다.


3. 독재정권과 폭력저항

북유럽 국가들 같이 민주적이고 개방된 사회에서는 시위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여론 수렴이 잘 되기 때문이다. 시위가 일어나더라도 집회/시위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폭력시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북한처럼 독재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시위가 일어나기 어렵다. 시민사회가 잘 발달되지 않았고 정보가 통제된 가운데 집회/시위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시위가 일어나더라도 폭력시위로 연결되기 힘들다. 정권의 처벌이 너무 혹독하기 때문이다.

남한처럼 크게 민주적이지도 않고 철저하게 폐쇄적이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회에서는 시위가 잘 일어나고 폭력 시위로 연결되기 쉽다.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아 여론이 무시되어 대규모 시위가 많이 일어나고, 정권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이른바 ‘원천 봉쇄’하거나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때문에 폭력시위로 번지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평화적 시위나 비폭력저항조차 막기 위해 정권이 폭력시위를 유도하기도 한다. 폭력시위를 겉으로는 비난하면서 속으로는 반기는 것이다.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다.


4.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저항

1)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

톨스토이는 1884년 발표한《나의 종교》와 1905년 출판된《신의 나라는 그대 마음속에 있다》 등을 통해 자신이 믿는 종교의 본질을 설명하고 삶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기독교를 내세우며 ‘악에 대한 무저항’을 주장했다. 성경 마태복음 5장 39절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전쟁을 불법적인 것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와 아울러 기독교인을 “이웃과 다투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거나 공격하지 않으며, 그와 반대로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고난을 당하며 ......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흔히 기독교라 불리는 교회의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무저항의 선구자들’인 퀘이커 교도들과 흑인 해방의 선구자였던 개리슨 등의 활동을 소개하고 인용하며 무저항의 당위성과 도덕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무저항’이란 말은 사전에서 정의하듯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악에 대해 무조건 저항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악에 대해 악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약성경 (Hebrew Bible)과 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에 기록되어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처럼 해를 당한 만큼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오히려 선으로 물리치는 것을 의미한다.

2) 간디의 비폭력저항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은 간디는 이를 비폭력주의로 발전시켰다. 인도 독립운동 초기에 무저항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불렀지만, 이 말은 ‘약자의 무기’인 것처럼 오해될 염려가 있어 ‘진리파악 (satyagraha)’ 또는 ‘비폭력 (ahimsa)’이라고 고쳐 불렀다. ‘무저항’이란 말은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소극적 저항’이란 말은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되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폭력저항’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간디가 주창한 ‘진리파악’이나 ‘비폭력’은 깊은 도덕의식과 종교의식에서 나오는 정신력으로, 그것의 본질은 상대방을 폭력으로 패배시키는 대신 정신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있고 스스로 고통이나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과 인간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상대방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게 아니라 성실한 마음과 기사도 정신을 갖고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찔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폭력은 “가장 강력한 폭력에 대한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간디는 무저항이나 소극적 저항을 비겁하거나 무능한 약자의 행위로 간주하며 비겁이나 무능보다는 차라리 폭력이 낫다고 주장했다. 진실을 밝히고 진실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을 때 침묵을 지키는 것은 비겁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증오와 폭력을 악으로 여겨 배제하자면서도, 악을 대하면 저항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비겁보다는 폭력을 써서라도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무저항이나 수동적 저항은 약자의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이나 비겁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이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해치려는 노력이며, 어떤 경우엔 남몰래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직접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비폭력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차라리 복수와 죽음을 무릅쓴 폭력적 저항이 차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와 간디의 비폭력주의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악에는 악으로 대적하지 말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어서도 안 되며 정당방위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간디는 불의에 대항할 줄 알아야 하고 비폭력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을 때는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비겁할 뿐만 아니라 무능하고 약한 자의 ‘엉터리 비폭력’은 세상에서 가장 비도덕적이라며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폭력을 행사할 수 없을 때 폭력은 필요하고 고상하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간디는 비겁한 무저항이나 거짓된 소극적 저항보다 정직한 폭력이 더 바람직하고 폭력적 저항보다는 비폭력 저항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소극적이거나 수동적 저항과 비폭력 저항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고 했다.

첫째, 수동적 저항은 악이나 부정에 대해 자신을 방위하는데 만족하는 소극적 행위이지만, 비폭력 저항은 억압당하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비폭력적 방법으로 억압자의 정서나 견해 또는 기질 등을 시정하고자 애쓰는 적극적 행위다.

둘째, 수동적 저항은 자신에게 약간의 고통을 주더라도 주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상대방을 괴롭히려는 것이지만, 비폭력 저항은 자기 스스로 조용히 기꺼운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고통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다.

셋째, 수동적 저항은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관념이지만, 비폭력 저항은 사랑을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정중한 경의를 표하고 그의 견해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가 신의와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그를 예절 바르고 참을성 있게 대하는 태도다.

넷째, 수동적 저항은 적당한 시기에는 폭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나, 비폭력 저항은 아무리 유리한 상황에서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섯째, 수동적 저항은 부정적이거나 일시적인 행위이지만, 비폭력 저항은 적까지 포함하는 인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표현이다. 따라서 비폭력 저항을 실천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갖지 말고, 자제와 자기희생 등의 훈련을 하며 끝까지 자신이 고통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비폭력저항과 아울러 간디가 중시했던 것은 시민의 ‘불복종’과 ‘비협력’이었다. 불복종은 양심의 질서에 따르기 위해 현실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요, 비협력이란 더욱 바람직한 질서를 확립하도록 돕기 위해 현실의 권력에 협력하지 않는 것이다.

3) 함석헌의 비폭력혁명

간디를 흠모하며 그의 사상과 투쟁방법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사상계》1961년 2월호에 발표한 “간디의 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간디의 비폭력저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사티아그라하’다. 진리파지 (眞理把持)다, 참을 지킴이다. 또 세상이 보통 일컫는 대로 비폭력운동이다. 사나운 힘을 쓰지 않음이다. 혹 무저항주의란 말을 쓰는 수 있으나 그것은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이름이다. 간디는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저항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죽어도 저항해 싸우자는 주의다. 다만 폭력 곧 사나운 힘을 쓰지 말자는 주의다. 그러므로 자세히 말하면 비폭력저항주의다.”

함석헌은 이에 앞서《사상계》1965년 1월호에 “비폭력혁명: 폭력으로 악은 제거되지 않는다”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이 날까지 이 역사를 이끌어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럽게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라고 한탄했다. 그리고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는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비폭력혁명’이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5. 독재정권과 비폭력저항

군대와 경찰 같은 정권의 거대한 폭력을 물리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을 갖지 않는 민중의 폭력투쟁이 성공할 수는 없다. 폭력투쟁은 정권에 폭력진압의 빌미를 주고 투쟁에 참가하지 않는 민중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독재정권이 폭력투쟁을 선호하거나 유도하는 배경이다. 폭력투쟁이 일시적으로 성공하더라도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폭력투쟁보다 비폭력저항이 바람직하다.

비폭력저항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도덕의식과 종교의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폭력으로 패배시키는 대신 정신력과 포용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상대방의 육체에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단식과 같이 자신에게 육체적 고통을 줌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찌르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 정치사회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떠받치거나 추종하지 않는 것이다. 건축물의 벽이나 지붕을 파괴하지 않고 기둥만 제거하면 아무리 견고한 건축물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듯이, 통치체제나 지배세력에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민중이 지지를 철회하고 추종하지 않으면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 1960년 4월혁명에 따른 이승만의 하야와 1987년 6월항쟁에 의한 전두환의 후퇴는 폭력투쟁이 아니라 비폭력저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2015.11.21, 이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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