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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일요시론-김영호] 5.16의 올바른 평가

by anarchopists 2020. 1. 2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5/17 10:37]에 발행한 글입니다.


5.16의 올바른 평가

현대 민족사에서 5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5.16군사혁명(1961)과 그 연장선상에서 광주민주화운동(1980)이 발생한 달이다. 5.16을 두고 오늘날까지도 해석이 구구하지만, 근본적 가치와 종합적 기준으로 따지자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구국의 일념’은 허울이고 철없는 군인들이 이기적인 동기로 일으킨 쿠데타였다. 평생 전쟁기술만 배운 3,4십대 군인들이 세상과 나라, 인생과 역사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쿠데타의 제2인자 김종필의 그 이후 최근까지의 정치적 행적을 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다.)

모처럼 성공한 민중혁명(4.19)의 결과 탄생한 명실상부한 민주정권을, 과도기적 혼란을 틈타, 뒤 엎고 일제통치에 맞먹는 기간 동안 나라를 자기 사물처럼 주물렀다. 그 영향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에도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다. 지역감정에 기초한 오늘의 정치질서는 박정희로 거슬러간다. 무의식화한 지역감정은 선거 때마다 기승을 부려왔고 앞으로도 쉽게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무도덕, 무질서, 무정신이 지배하는 오늘의 사회와 시국은 바로 5.16의 결과이다. 4.19와 5.16 세대는 완전히 청춘을 아니 인생을 이 군인집단에게 빼앗긴 셈이다. (한 가지 예로 동아일보해직기자들의 일생을 재구성해보라. 이들은 지금 하얀 백발이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일생을 공익에 바친 진정한 애국자요 정의의 기수들이었다.)

그래도 5.16이 긍정적인 순기능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경제발전을 내세운다. 그것은 그 때문에 덕을 본 계층과 지역사람들의 억지 주장이다. 산업을 포함한 진정한 국가발전은 오직 민주주의의 발전정도와 비례한다. 발전의 동력은 민주적 체제에서 가장 잘 나온다. 세계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쿠데타로 지배받아온 동남아국가들(미얀마, 파키스탄, 캄보디아, 태국)과 남미국가들을 보라. 여러 면에서 가장 뒤쳐진 국가들이다.

그럼에도 한국이 발전한 것은 국민의 저력 때문이다. 군사혁명 때문에 이만큼 발전했다는 것은 국민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5.16이 아니었다면 그때 민주당 정부가 추진하던 국토개발 및 경제계획으로 차근차근 무리 없이 발전하여 오늘날 세계에 유례없는 재벌중심의 파행적인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아닌 유럽식의 건실한 경제체제가 확립되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유물주의적 가치관이 지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5.16은 마치 이성계가 군사쿠데타로 고려왕조를 뒤엎고 자기왕조를 세운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세운 정권이 500년 동안 해 낸 일은 초라하다. 배타적인 유교 이념 하나로 통치한 결과 민족문화는 정체되고 국세는 약화하여 일본의 지배를 초래하였다. 그 여파로 국토분단과 6.25와 4.19. 6.25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다시 ‘이’씨 조선에 복귀한 셈이다. ‘수난의 여왕’에 불어 닥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다. 이조 27명의 왕들 가운데 고작 세종 (정조 정도) 같은 한 두 명 정도가 제대로 통치한 군주였다. (왕을 대치한 대통령들의 성적도 좋은 편은 아니다. 두 가지가 다 문제다. 왕조격인 북한 통치체제도 그래서 문제다.)

4.19, 5.16 하면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 함석헌이다. 4.19 혁명이 발생하게 된 과정에 크게 공헌 한 것이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였는데 이 잡지의 백미는 함석헌의 글이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를 비롯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글들이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5.16이 나서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그가 곧장 담대하게 써 갈긴「5.16을 어떻게 볼까」(1961.6)는 그 시대의 횃불이요 촛불이었다. 그 글을 맛보자면,

“만나기만 하면 사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지요’ 한다.... 마지막이란 말이 무슨 소리일까. 이번 군사혁명은 먼젓번 학생혁명에서도 일단 낮아진 것을 아는 말이다. 그때는 맨주먹으로 일어났다. 이번엔 칼을 뽑았다. 그때는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다 같이 있는 양심의 권위, 도리를 믿었지만, 이번엔 총알과 화약을 믿었다. 그만큼 낮다. 그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엔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인이다.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은 밤중에 몰래 갑자기 됐다. 그만큼 정신적으로는 낮다.”(「5.16을 어떻게 볼까」)

이렇듯이 함석헌은 4.19와 5.16을 분명히 구분 짓는다. 그의 비판은 해를 거듭해도 숙어지지 않았다. ‘4.19는 혁명이고 5.16은 반혁명이다.’ ‘혁명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었다.’ 5.16을 ‘오일육’(汚一戮), 즉 ‘더러운 한 살육’이라고 풀었다. 『사상계』가 폐간이 되자 그 비판은 그가 창간한 『씨알의 소리』를 통해서 계속했다. 그 끈질긴 저항이 민주화에 어떤 지식인보다 크게 공헌했음은 물론이다.

5.16의 유산으로 우리가 오늘도 견뎌내고 있는 것 하나가 대통령제이다. 박정희가 휘두르던 무소불위의 권력의 틀이 전승되었다. 가히 왕조시대 군주에 못지않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이 속도 시대에 5년을 참아내야 한다. 우상숭배의 행태가 난무한다. 박정희가 폐기시킨 내각제와 양원제는 거의 모든 선진국들의 표준적인 제도이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미국은 불안정한 측면이 많다. 부시 같은 수준의 지도자를 8년이나 견디다가 이락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대공황에 맞먹는 금융위기를 맞고 있다. 과거의 우리 대통령들을 평가해보라. 하나라도 바람직한 경우가 있었는가. 좋은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행운, 국운이라고 할만큼 어렵다. 5.16을 역사 속에서 지우기 위해서는 4.19혁명의 소산인 원래의 정치제도로 복원하는 일이 첫째다. 그렇지 않으면 박정희의 후손이나 후예를 맞는 비극이 계속 연출될 것이다.

5.16으로 인하여 3.1운동-광주학생운동-항일독립운동-4.19로 이어진 민족/민중정신이 단절되었다. 오늘 이 사회가 양심과 정의의식이 마비된 정치인,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 졸부들, 들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정희와 그 졸개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허송했다. 죽기도 했다. 이들은 가슴 밑바닥에서 박정희 후예들에게 오늘도 외친다, 우리의 청춘을 돌려다오! 인생을 돌려다오! 물신주의에 빠진 국민은 외쳐야 한다, 잃어버린 우리의 정신, 영혼을 찾아다오!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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