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6/28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클뤼니 수도원 등 여러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노르망디 베크의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밤낮으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캔터베리의 대주교직을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와 중에서도 위대한 학문적인 업적들을 남겼다.
안셀무스의 신에 대한 물음은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무작정 신앙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한 존재를 이해하게 될 때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아닐까. 무한 존재는 어디에든지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면 믿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종착역이 아니라, 믿음이 목적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는 우선 무한 존재의 발견은 바로 모든 것 안에 있다고 말한다. “최고 본질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 그 최고 본질이 다른 모든 것을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 안고, 관통하는 분임은 명백하다... 최고 본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있다.”(in omnibus quae sunt)
더불어 무한 존재는 말씀(logos)이다. 무한 존재는 영원하다. 그런데 말씀 또한 그분과 영원한 존재이니 영원을 공통적으로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셀무스는 그것을 “공통영원”이라고 한다. “영원히 자기 스스로 말한다면, 그의 말씀(단어)은 영원히 그의 곁에 존재한다... 이 말씀은 말하는 분과 공통영원(coaeternum)...”하다. 말씀은 무한 존재 그 자체와 같이-영원, 함께-영원할 뿐만 아니라 최고 지혜이자 최고 이성이다.
하지만 무한 존재는 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당신은 전적으로 모든 곳에 계시지만,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당신 안에서 내가 움직이고 당신 안에 내가 존재하지만, 나는 당신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시고 내 주위에 계시지만, 나는 당신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인간의 신에 대한 인식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 믿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단지 저의 가슴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 왜냐하면 저는 <만일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 Nisi credidero, non intelligam>는 것도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논리를 보면 이성과 신앙의 완벽한 조화를 꾀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앙과 이성의 마지막은 관상(contemplatio)이다. 세상은 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우리를 뒤흔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고요한 가운데 신을 의식하려고 해야 한다. 일체의 잡념을 내려놓고 오직 무한 존재만을 추구하는 자세, 그래야만 이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에서 그분 안에서만이라도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잠시 동안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잠시 동안 당신의 요동치는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숨기라. 당신의 골치
아픈 염려들을 이제 잠시 내려놓고, 당신의 수고로운 일들을 덜 생각하라. 하느님을 위한 시간을 조금 만들고 그분 안에서 잠시 쉬라. 당신의 마음의 방에 들어가 하느님 외에 모든 것을, 그리고 당신이 그분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다 닫아버리라. 당신이 문을 닫을 때 그분을 추구할 수 있다.”
때로는 세상이 집어 삼킬 듯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더라도 그것을 의식하거나 마음 두지 말고 초연하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존재를 만난다면 더 큰 삶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안셀무스가 고백한 것처럼, “당신은 생명이요, 빛이요, 지혜요, 복됨이요, 영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안셀무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안셀무스의 신에 대한 물음은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무작정 신앙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한 존재를 이해하게 될 때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아닐까. 무한 존재는 어디에든지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면 믿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종착역이 아니라, 믿음이 목적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는 우선 무한 존재의 발견은 바로 모든 것 안에 있다고 말한다. “최고 본질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 그 최고 본질이 다른 모든 것을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 안고, 관통하는 분임은 명백하다... 최고 본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있다.”(in omnibus quae sunt)
더불어 무한 존재는 말씀(logos)이다. 무한 존재는 영원하다. 그런데 말씀 또한 그분과 영원한 존재이니 영원을 공통적으로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셀무스는 그것을 “공통영원”이라고 한다. “영원히 자기 스스로 말한다면, 그의 말씀(단어)은 영원히 그의 곁에 존재한다... 이 말씀은 말하는 분과 공통영원(coaeternum)...”하다. 말씀은 무한 존재 그 자체와 같이-영원, 함께-영원할 뿐만 아니라 최고 지혜이자 최고 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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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한 존재는 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당신은 전적으로 모든 곳에 계시지만,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당신 안에서 내가 움직이고 당신 안에 내가 존재하지만, 나는 당신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시고 내 주위에 계시지만, 나는 당신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인간의 신에 대한 인식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 믿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단지 저의 가슴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 왜냐하면 저는 <만일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 Nisi credidero, non intelligam>는 것도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논리를 보면 이성과 신앙의 완벽한 조화를 꾀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앙과 이성의 마지막은 관상(contemplatio)이다. 세상은 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우리를 뒤흔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고요한 가운데 신을 의식하려고 해야 한다. 일체의 잡념을 내려놓고 오직 무한 존재만을 추구하는 자세, 그래야만 이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에서 그분 안에서만이라도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잠시 동안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잠시 동안 당신의 요동치는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숨기라. 당신의 골치
때로는 세상이 집어 삼킬 듯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더라도 그것을 의식하거나 마음 두지 말고 초연하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존재를 만난다면 더 큰 삶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안셀무스가 고백한 것처럼, “당신은 생명이요, 빛이요, 지혜요, 복됨이요, 영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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