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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서평, 독후감

John Wolfgang von Goethe, 윤용호 옮김, 파우스트1/2, 종문화사, 2021.

by anarchopists 2021. 6. 10.

John Wolfgang von Goethe, 윤용호 옮김, 파우스트1/2, 종문화사, 2021.

 

“파우스트, 죽음의 허무인가? 구원의 희망인가?”

 

《파우스트(Faust)》가 종문화사에서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습니다.《파우스트》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미학자 쉴러와 교분이 있었다는 정황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철학자 칸트와도 연관이 있을 법합니다. 15-16세기 경 독일에 실존했다는 연금술사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기초로 작품이 만들어진 괴테의 독특한 문학적 세계는 영국에서 이미 출간된 16세기의 작품과 레싱으로부터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수려한 문체와 짜임새 있는 구조, 그리고 인간애의 연민은 계몽적이고 낭만적인 인간상을 오롯이 드러냅니다. 더욱이 괴테의 파우스트는 성서적 관념과 대화체는 흡사 신과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는 욥기서를, 아리엘과 파우스트의 대화는 시편을 연상케 합니다. 괴테의 사상적 표현과 친절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는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그 명료함에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파우스트는 철학, 신학, 법학, 의학까지 당대 최고 학문을 두루 섭렵했지만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팔아 넘긴 최후는 매우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인생사가 그렇듯 삶의 곳곳에 배어있는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파우스트의 지혜로운 언어는 그냥 곱씹어도 그 자체로 교훈이 될 만합니다. 단순히 괴테의 작품(Werk)이니까 예술적이지 않겠는가, 하고 속단하기에는 파우스트의 인생 고민과 삶, 처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정신이 훌륭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물질이 달라붙는다거나, 선에 도달해도 어느 순간 더 나은 선이 등장하면 이전의 선은 거짓이 되고, 생명의 아름다운 감정도 속세에서는 속절없이 굳어진다’는 표현은 무릎을 치게 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신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라는 멋진 문장은 종교에 대한 인간의 반항적 의식을 반영합니다. 철학적 탁월함은 어떨까요? 무와 유, 악과 선의 대결 구도 속에 인간은 결국 천박한 세계로 떨어지고, 악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파는 자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독자들에게 던집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와 아낙사고라스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 신화에까지 해밝은 괴테는 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가감 없이 풍자(‘사제조차도 경건한 기도서 사이에 지폐를 넣고 다닌다’)하고, ‘위대한 사상은 재물에 비하면 빈약한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조소 섞인 말, ‘공포와 희망은 인간의 큰 두 가지 적’이라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는 괴테의 문학적 기치를 더 도드라지게 합니다. ‘허영심과 천박함이란 똑똑한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조롱하는 파우스트의 언어적 감각은 괴테의 문학적 상상력에서 빚어진 비판적 성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근심’은 마음속에 쟁쟁하게 울리면서 평생 앞을 못 보게 합니다. 자족하지 못한 인간은 허망한 순간을 붙잡으려 합니다. 시계가 멈추고 마침내 시계 바늘이 떨어집니다. 백발이 다 되어 모래 위에 누울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파우스트는 “자유로운 땅,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자 원했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정말 아릅답구나”였습니다. 마치 이것은 독일 근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죽기 전에 했다는 외마디 “좋다”(Es ist gut)와 닮았습니다. 무(Nichts)로 쓸려가기 전 “생명이란 잠시 빌린 것이어서 빚쟁이들이 너무 많다”는 레무르들의 이야기들이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구원은 여전히 신의 긍휼을 기다려야 할 몫인가 봅니다. “영혼이여, 숨쉬소서”라는 말과 함께 불멸의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로 오르는 파우스트의 모습은 천사들과 함께 용서를 빌어주는 기도를 통하여 인간을 향한 괴테의 염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삶과 사유, 그리고 여러 가치관을 잘 드러내 준 파우스트는 인간의 본래성을 다시 묻게 하는 것 같습니다. 기나긴 여정을 살아야 할 인간의 몫, 그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화작가 미하엘 엔데(M. Ende)의 작품 중에 《냄비와 국자전쟁》이 있습니다. 마녀가 준 냄비와 국자만 있으면 맛있는 수프를 맘껏 먹을 수 있는 그 도구들로 인해서 전쟁까지 불사했던 두 나라가 종국에는 해결점을 찾게 된다는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결론부에서 그런 이상적인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인간의 궁극적 자리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를 모색하기도 전에, 메피스토펠레스의 목소리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면 이미 욕망의 심술쟁이 마녀에게 영혼이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괴테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들의 행복이라는 것, 현재는 보물이라는 것.”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책에서 풍자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들은 무엇이 나 같은 시인을 정말 즐겁게 하는지 아는가? 아무도 듣길 원하지 않는 것을 노래하고 말하는 것이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할 당위성을 보탠다면 정성을 들인 유려한 번역입니다. 더불어 편집자의 노고를 파악하게 하는 겉표지는 책의 내용을 단박에 알게 해주는 독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파우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허영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한 이해입니다. 영혼의 본처(本處)를 찾아 헤매는 나 자신에 대한 여정입니다.

 

김대식_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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