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신대식 교수 칼럼

5.18광주시민혁명과 언론황제

by anarchopists 2019. 11.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5/18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5.18광주시민혁명과 언론황제

5.18광주시민혁명은 사건의 성질상 두 가지로 특징을 갖는다. 광주 안에서 직접적으로 반민주적, 반인권적, 반인민적 독버섯 전두환 살육부대에 맞서 투쟁한 시민혁명운동과 광주 밖에서 광주시민혁명을 지원하고 이를 전국적 시민혁명으로 발전시키고자 투쟁한 광주시민혁명승화운동이다.

광주 안에서 민주혁명운동도 중요했지만 광주 밖에서 혁명승화운동 또한 중요했다. 당시 광주에서 시민혁명운동은 전두환의 전국적 언론탄압과 시민혁명의 진상왜곡으로 황당하게도 “폭도들의 난동”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다. 그래도 스스로 민족정론지라고 자처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은 광주시민혁명에 대하여 바른 보도를 했어야 옳았다. 이들 언론황제들마저 신군부의 권력 앞에 기 눌려 비겁하게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에 광주 안과 밖에서 전두환 찬탈권력의 살기어린 감시망을 피해가면서 광주시민혁명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민주애국인사들의 호외투쟁이 있었다.

광주시민혁명의 진상을 담은 유인물이 용기 있고 정의로운 인사들에 의하여 광주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주 안에서 이러한 투쟁을 한 단체는 상당히 많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남대 학생회와 천주교광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다. 이들이 만든 유인물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이 ‘전두환광주살륙작전’이라는 유인물이다. 이러한 참된 진실을 담은 유인물들은 광주 밖의 민주애국인사들의 배포활동과 노력이 없었다면 5.18광주시민혁명의 진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광주 안과 밖에서 함께 노력하고 투쟁한 결과, 점차 1980년 5월 광주에서 “백정 전두환의 야수와 같은 더러운 인간살육이 있었고 광주시민의 민주주의를 되찾고 신군부를 타도하려는 혈투의 시민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광명천지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결과 광주 밖에서 광주시민혁명을 계승하여 전국적인 “신군부타도, 미군철수를 통한 민주사회와 통일국가를 위한 시민혁명운동”이 일어나기를 희망하였던 인사들이 많았다. 그러자 전두환은 민주애국인사로 의심되는 자들을 불법으로 체포하여 감금하고 고문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반국가단체 일원으로 조작하여 옥살이를 시켰다.

그러면 5.18광주시민혁명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1979년 10월 26일 유신독제를 통하여 영구집권을 노리던 박정희는 권력내부의 모순에 의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한국 사회는 순식간에 권력의 공백기가 발생한다. ‘박정희총살사건’(김재규에 의한)의 수사책임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부의 사령관 전두환이 이 기회를 포착한다. 전두환은 재빨리 군부에 오랜 동안 부식해 놓았던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를 형성한다. 그리고 박정희의 친미반공정권을 승계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것이 한국의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기습적인 12.12쿠데타이다.(1979)

이로써 정승화(계엄사령관)와 김재규를 제거한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의 권력까지 장악하고 군부독제체제를 구축한다. 그리고 정권장악을 위한 첫 단계로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 1980년 5.17계엄령 확대조치이다. 당시 남한의 ‘자유민주세력’들은 더 이상의 군부정권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군부의 친미반공정권 승계음모를 반대하는 시위집회를 연일 곳곳에서 열었다. 그러자 권력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던 전두환은 이를 군부폭력으로 탄압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터져 나오는 민주화요구가 어느 한 지역에서 대규모로 폭발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바로 ‘광주’지역이다.

전두환이 광주를 그들 ‘살율작전지’로 삼은 것은 비열하게도 지역감정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악용하기 위함이었다. 이 결과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허위 선전했다. 이것은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짓누름으로써 전국적인 민주화 투쟁에 쐬기를 박으려는 음모였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권력승계의 정당성을 삼으려 했다. 이것이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이 보여준 ‘5.18광주학살’의 배경이다.(1980)

‘5.18광주학살’ 뒤, 전두환 등 신군부는 권력기반의 안정을 도모한다. 그것이 바로 반미ㆍ반군부적 성격을 지닌 모임과 단체, 그리고 그러한 인물로 지목된 자들에 대한 무차별 체포ㆍ구금이다. 지방에서 일어난 아람회ㆍ한울회ㆍ금강회ㆍ오송회ㆍ부산 미문화원사건ㆍ강원도지역학생의 미성조기방화사건 등이 이에 해당된다.(1981)

어느 시민의 위대한 시를 여기에 붙이면서 글을 마무리해 본다.

광주가 더 위대했던 것은~~~,
단순히 군부독재의 만행에 대한 저항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도시에서 잃어가고 있던 공동체의 따스함,

약자가 좌절 앞에서
서로를 향해 폭력을 들이대지 않고 뭉쳐
스스로를 지키려 한 그 성숙함,

극한적 상황에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용기,
악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 등등,

이것은 정녕 광주시민만이 아닌
한국인 모두의 자부심이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국내 수구언론들은 이들을~~~!
폭도라고 불렀었다.”

(2012. 5.18 다시 쓰다,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