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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정민수 학생

조용해서 잔인한, 명명의 폭력

by anarchopists 2019. 10. 2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4/06/07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조용해서 잔인한, 명명의 폭력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폭력이 존재한다.
학교폭력, 성폭력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폭력은 대개 가시적인 양태를 띤다. 이 때문에 반드시 나에 대한 폭력이 아닌 타인을 향한 그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이 반드시 가시적인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안일하고도 위험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조용한 폭력이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앞서 말한 가시적인 폭력인들 예방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건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은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혹은 모른 척하고-지나치는 것이야 말로 심각한 정신적 자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명명(命名)의 폭력’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는 이름이 붙여진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누군가의 형제로, 그리고 누군가의 제자로 불린다. 그리고 이렇게 붙여진 이름에는 그에 걸맞은 행동이 기대된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어야 하며,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른다. 하지만 이를 달리 보면 이름은 그 사람의 행동을 구속하는 면이 있다. 또한 이러한 구속이 바로 폭력이 될 수 있기에 우리가 타자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내가 부른 이름이 상대방의 존재를 결정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이 과연 올바른 이름인지, 아니면 우리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폭력은 아닐는지. 그리고 지금부터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이 조작된 명명은 아닌지 따져보고자 한다.


‘근로자’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이를 말 그대로 따져보면 ‘근면하게 노동하는 자’라 하겠다. 우리는 언제부터 ‘노동자’를 ‘근로자’라 부르게 된 걸까. 달력을 보면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이 연대의식을 다지는 날로,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제의 쟁취와 유혈탄압을 가한 경찰에 대항한 미국 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박정희 정권이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의 법정기념일로 정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명에는 어떤 의도가 은폐되어 있을까.

물론 모든 노동자가 부지런히 일하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근면’이라는 말에 보편적 노동자들을 불온시하고, 노동자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행동을 적대시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어떠한가(박남일, 『어용사전』, 서해문집, 2014, 300쪽). 통치자나 유산계급의 입장에서 봤을 때 처음부터 순수한 의미의 ‘노동자’를 ‘근로자’라 부르는 것이, 이로 하여금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행동을 통제하기 쉬운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국민’이라는 단어 또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통제하는 명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여러분들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게티츠버그 연설문 중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라는 구절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흔히 여기서의 ‘people’을 ‘국민’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는 ‘인민’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국민’과 ‘인민’은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국민(nation)’은 헌법학자 시예스가 『제3계급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정립한 개념으로, 주권의 주체인 국민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서 이념적 통일체에 불과할 뿐 주권을 직접 행사할 수 없는 주체를 말하며, 헌법학에서는 이를 ‘국민주권론’이라 부른다(정회철, 『기본강의헌법』, 여산, 2011, 106쪽). 한편 ‘인민(people)’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정립한 개념으로, 주권의 주체인 인민은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유권적 시민의 총체로서 주권을 보유할 뿐만 아니라 주권을 직접 행사하는 주권자를 말하는데, 헌법학에서는 이를 ‘인민주권론’이라 칭한다(같은 책). 요컨대 ‘국민(nation)’은 주권을 국가로부터 확인받아야 하는 반면, ‘인민(people)'은 국가에 우선하는 주권의 본래적 보유자이자 행사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인민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이것 또한 민주주의의 주체인 우리 인민들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주권을 시혜적으로 나누어 준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한 언어적 선동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때마침 공산권에서 ‘인민’이라는 말을 선점하였다는 좋은 핑계거리도 있지 않는가. 이는 레드 콤플렉스를 기득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국가주의적 발상이다. 또한 손쉬운 통제를 위해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일련번호를 하나씩 부여한 주민등록제도 또한 우리를 ‘국민’으로 여긴다는 증거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젊은이들을 ‘88만원 세대’-‘88만원 세대’라는 말은 경제학자 우석훈이 그의 저서 『88만원 세대』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여기서의 88만원은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20대의 평균 소득 비육 74퍼센트를 곱해서 산출한 금액이다. 우석훈이 처음 이 말을 사용한 의도는 옅어지고 대학 졸업 이후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20대의 평균 임금 소득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세대
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요컨대 처음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이 어휘가 가리키는 객체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공포심을 무의식에 아로새겨 자본의 노예가 되도록 악의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함부로 우리의 가슴팍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표를 붙인 명명의 폭력이 가지는 치졸한 의도를 나는 알고 있다. 정치든 사회든 관심을 버리고, 오로지 이 험난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스펙’이라는 나의 상품가치를 올리는 데에만 몰두하라는 뜻일 게다. 하지만 이보다 더 비겁한 것은 이러한 명명이 주는 공포감에 지레 겁먹고 민주시민으로서 응당 관심을 가져야 할 것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을까.



*위 이미지는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정민수 학생은
정민수 씨는 서울의 숭실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하고는 있는 법학도로서 현시대의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근본적인 데서부터 고민하려고 한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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